Page 97 - 칭의와 성화-김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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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의 많은 부흥사들은 ‘성화’에 힘쓰고 교회를 잘 섬긴 사람은 최후의 심판에서 큰 면류관
을 받고 하늘나라의 아파트 로열층에 들어가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부끄러운 구원’
을 얻으며 냄새나고 햇볕도 잘 안 드는 1층에나 들어가게 된다고 현란한 비유의 언어로 설
교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상급’ 신학을 가르치면서 교회에 대한 충성과 전도와 선교에의
열심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해석은 틀린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러한 ‘상급’ 신학을 가르친다고 생
각하는 고린도전서 3장 뒤 9장에서 ‘상’을 또 언급하는데, 거기서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
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당연히 교회의 재정 지원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사도직을 감당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논증합니다
(9:1~14). 베드로 등 다른 사도들의 관행, 일반 사회의 상식, 모세의 율법, 성전의 사제들의
예 등에 호소하면서 자신도 그러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웅변하는데 그 클라이맥스에 ‘주의
명령’을 인용합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선포자들에게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계를
얻으라고 명령하셨다”(9:14; 눅 10:7/마 10:10; 참조. 갈 6:6). 바울이 예수의 말씀을 직접 인
용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이곳 외에 고린도전서 7:10; 11:23~26, 그리고 데살로니가
전서 4:15~16에서만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예외적으로 주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
신이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생계 지원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강력히
논증하고는, 이어서 뭐라고 말합니까? “그러나 나는 이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않았다”라고
놀라운 선언을 하지 않습니까?(9:15) 그러고는 복음 선포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 아니 자
신에게 지워진 ‘숙명’(아낭케, anangke, 한글 성경에는 ‘부득불 할 일’이라 번역되어 있음)
이라는 것에 이어서 자신이 자비량하며 복음을 무료로 선포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진술하
지 않습니까?(9:16~18).
그러니까 바울이 예수의 말씀(‘명령’)을 거슬렀던 것입니다. 바울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지
식이나 의존을 최소화하려 한 불트만(R. Bultmann)과 그의 추종자들은 여기 9:14~15을 자
신들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즐겨 사용했습니다. “바울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태를 잘 알지 못하였고 거의 무시하였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한 번 인용해 놓고도 금방
자신은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는 또 하나의 구절을 봐
라. 7:10에서도 ‘이혼하지 말라’라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고는, 7:15에서는 혼합 결혼의 상
황에서 신자 배우자에게 비신자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하거든 이혼하라고 가르치지 않느
냐?” 불트만(Bultmann) 학파는 이런 식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솔한 해석
입니다. 두 곳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바울이 예수의 명령을 문자적으로 율법적으로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함께, 그러나 그 정신(의도)을 철저히 따른다는 것입니다(7:10~16
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제 책 「고린도전서 강해」(두란노)를 참조하시오).
바울은 복음 선포자의 생계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자기의 상황에서 문자 그대로 순종했다
가는 예수께서 그 말씀을 주신 의도와는 반대 효과가 날 것을 우려했기에 그것을 문자주
의적으로, 율법주의적으로 적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의 근본주의자들,
다양한 상황들에 다양하게 주어진 성경 말씀들을 역사 비평, 문서 비평 등 중요한 비평 방
법들을 건설적으로 쓰기를 거부하고 항상 문자적으로, 율법적으로만 해석하려 하는 사람
들이 이러한 바울의 예수의 말씀 사용의 예에서 중요한 해석학의 원칙 하나를 배워야 합
니다. 그리고 항상 복음의 원칙에 근거해서 신학적인 사고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이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왜 바울이 데살로니가(살전 2:1~11), 고린도 등에서 복음 선포자의 생계에 대한 예수의 말
씀에 역행하여 교회의 생계 지원을 거부하고, 그 도시들의 가죽 공장, 천막 공장에서 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