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 - 칭의와 성화-김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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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유대교에 대항해 논쟁을 벌일 때 쓰는 두 문구들, ‘
율법의 행위들’과 ‘나의(또는 그들의) 의’의 의미만 새롭게 깨달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전자는 유대인들이(또는 우리가) 율법의 세세한 계명들을 다 지켜 공로로 내세
울 수 있는 행위들로 이해되었고, 후자는 개인들이 그러한 ‘율법 지킴’으로 인정받는 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샌더스(Sanders)가 밝힌 대로 당시 유대교가 율
법을 세세히 지켜 의인으로 인정받기를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되고, 사도 바울의 이방 선교 상황과 관계되는 사회학적 개념들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율법의 행위들로는 의인으로 칭함 받지 못한다”라고 할 때, 바울은 율
법의 모든 계명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선택된 언약 백성
됨’을 표징하는 할례, 안식일 지킴, 그리고 정결의 법들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였다는 것
입니다. 이 세 가지 법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됨’의 현저한 표징들
(identity-markers)로서 그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시켜 그들을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
의 백성 됨’의 신분을 유지하는 울타리 표지판(boundary-markers) 기능을 했다는 것입니
다.
그러니까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 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리고 우리의 믿음으로
만 의인이라 칭함 받는다”라고 가르칠 때, 그가 말하는 바는 ‘이방인들도 할례, 안식일 법,
정결법 등을 지켜 유대교로 개종할 필요 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였다는 것입니다.
던(Dunn)과 라이트(Wright)는 또 샌더스(Sanders)에 의하면 유대교가 율법을 세세히 지켜
개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친 종교가 아니므로, 바울의 ‘(그들)
자신의 의’와 ‘나의 의’라는 언어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10:3에서 유대인들이 ‘자신의 의’를 세우려 한다고 비난할 때, 그것
은 그들이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켜 의인으로 인정받으려 한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자기 민족만이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 즉 개인적 의가 아니라 ‘민족적 의’를 주
장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고, 빌립보서 3:9에서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얻으
려 한다 할 때도, 바울 자신이 율법을 철저히 지켜 얻은 개인적 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
라 자신이 한 사람의 유대인으로서 유대 민족의 ‘민족적 의’에 참여함을 두고 말하는 것이
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의 두 개념들 ‘율법의 행위들’과 ‘나(또는 그들) 자신의 의’를 새롭게 해석하면,
바울이 그의 칭의론으로 샌더스(Sanders)가 규명한 당시의 유대교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
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 안식일 지킴, 정결의 법들을 내세우
며 그런 법들을 지키는 자신들만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의롭고 결국 구원을 받는다는
민족적 우월감을 가지고서 이방인들을 배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
의 거룩하고 의로운 백성의 공동체에 포함되기를 원하면 할례를 받고 개종하여 자신들과
같이 안식일과 정결의 규례들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 즉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이방인들이 모세 언약의 성취로
오신 메시아 예수의 구원을 덧입으려면 먼저 할례를 받아 그 모세의 언약 체계에 들어와야
한다, 곧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에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러한 사상을 배격하고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복음을
믿음으로써만 의인으로 칭함 받고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자,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갈라디아, 빌립보 등의 바울 교회들에 찾아가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고 모세
의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