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 - 칭의와 성화-김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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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라이트(Wright)가 바울의 숙어들인 ‘율법의 행위들’과 ‘나의 의, (그들) 자신의 의’, 그리
고 바울의 율법에 대한 비판을 잘못 해석했다는 것을 논증하였는데, 그런 것을 여기서 자
세히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특히 던(Dunn)과 라이트(Wright)가 바울이 지
적하는 율법의 근본적인 한계와 문제성을 경시하였음만을 간단히 지적하려 합니다.
가령 갈라디아서 3:15~22에 보면 율법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지 430년
후에나 주신 것인데, 율법은 근본적으로 영생을 줄 능력이 없으므로 그것으로는 의 또는
그 약속의 성취를 얻을 수 없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 또는 약속의 성취를 얻
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바울의 율법에 대한 비판이 유대주의자들과 논쟁
하는 로마서, 갈라디아서에서만 나온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주 피상적인 관찰에 근거한 주
장입니다. 갈라디아서 3:15~21에서 율법의 본질적인 한계성을 이렇게 지적하는 바울은 고
린도전서 15:54~57에서 뭐라고 합니까?
“죽음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에 의해 삼켜졌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쏘는 것(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음의 쏘는 것(독침)은 죄이고, 죄의 권능은
율법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할지어다.”
율법이 죄로 하여금 권능을 갖게 하고, 죄가 우리 몸속에 죽음을 쏘아 넣는 독침 노릇을 하
여 우리가 죽음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율법, 죄, 죽음이 서로 연합하
여 인간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4~56에서 간단히 이 세 마디로 요약한 말을 우리의 ‘육신’이 율법으로 하
여금 죄에게 권능을 갖게 한다는 사실을 덧붙여 전개한 것이 로마서 7~8장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율법이 육신, 죄, 죽음과 연대하여 우리 아담적 인간들로 하여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리요” 하고 부르짖게 하는 힘으로 작용
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의 근본적인 한계성과 문제성을 지적하는 바울이 “
율법의 행위들로는 우리가 의인 되지 못한다”라고 할 때 겨우 유대인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시키는 할례, 안식일, 정결의 법들의 기능에만 초점을 맞추어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여기서 제가 존경하는 스코틀랜드의 학자 마셜(I. H. Marshall)이 살핀 바, 즉 에베소서
2:8~10, 디모데후서 1:9, 디도서 3:4~7에 바울의 칭의론이 전통적인 종교개혁적 의미로 해
석되어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서신들에 대해 바
울의 제자들이 바울의 신학 유산을 자신들 시대의 교회의 필요에 맞추어 해석하며 쓴 ‘후
기 바울 서신들’이라고 봅니다. 덧붙여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보고하는 바울의 루스드라에
서의 설교(13:39),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의 연설(15:10~11)도 참조해야 합니다. 누가도
바울의 제자라면 디모데나 디도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칭의론을 가장 잘 이해했을 것 아닙
니까? 바울에게 직접 들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제자들이 칭의를 어떻게 해석
합니까? 위의 구절들을 보면, 바울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거나 시대적으로 기껏해야 한 세
대 정도 뒤에 그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그들은 칭의론을 전통적인 종교개혁 신학적인 관점
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관찰은 ‘새 관점’에 대한 굉장히 중요한 도전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레이제넨
(Räisänen)의 비판에 대해서 20세기의 샌더스(Sanders)가 1세기의 유대교를 바울보다 더
잘 알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냐고 물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비슷하게 20세기의 던(Dunn)
과 라이트(Wright)가 바울의 칭의론에 대해서 그의 직계 제자들인 디모데, 디도 등보다 더
잘 알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