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1 - 칭의와 성화-김세윤
P. 61
리고 우리의 믿음으로 의인이라 칭함 받는다는 그의 칭의론을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와
같이 명백히 전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서신들에도 칭의론이 없다
보고, 바울이 고린도에서는 칭의론의 범주로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
나 저는 이 판단도 피상적인 관찰과 원자주의, 문자 실증주의적 해석의 결과라고 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이 하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2~57입니다. 15장에서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복음의 핵심으로 길게 강론
하는데, 그 절정에 이르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도 부활의 생명을 얻어 죽음
을 완전히 극복하게 되리라고 다음과 같이 웅변합니다(15:52~57).
“…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
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
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벌침]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벌침]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여기서 바울은 죽음과 죄와 율법을 서로 연대하여 인간들을 파멸에 몰아넣는 원수들로 의
인화해서 설명합니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 데 있어 마지막으로 극복해야 하는 원수가 죽음
인데, 그것이 죄와 율법과 연대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음이 ‘쏘는 것’은 벌의 침을
뜻합니다. ‘죽음의 벌침은 죄이다’인데, 그것은 죄가 죽음의 독기를 우리 몸속에 전달하는
침 노릇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죄의 품삯은 사망이다”(롬 6:23)라는 말과 결국 같은
뜻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음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다”는 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것
을 로마서 7:7~12에서 아담의 예를 들어서 이렇게 풀어냅니다. “율법이 아니었더라면 죄
를 몰랐을 것이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이다. 그러나 율법이 있음으로써 죄라는 것
이 실재하게 되고, 죄가 있음으로써 결국 인간이 죽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율법이
죄에게 힘을 갖게 하고, 죄가 결국 죽음을 가져온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암묵적으로 전제된 것이 죽음의 궁극적인 원인인 사탄의 통치입니다. 사탄이 율법
을 이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하고, 죄인으로서 죽음을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자세히 논증할 수 없지만, 고린도전서 15:55~56에서 두세 마디로 요약 설명하는
‘우리를 파멸에 몰아넣는 율법과 죄와 죽음의 연대성’을, 거기에 또 하나의 악한 세력인 ‘육
신’을 덧붙여, 길게 풀어내는 것이 로마서 7장입니다(비교. 갈 3장).
이 말은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와 같이 율법의 문제들을 자세히
논하면서 율법 지킴으로는 우리가 의인이라 칭함 받을 수 없음을 논증하지는 않지만, 로마
서 7장에서 하는 그런 논증의 요점들을 위의 서너 마디로 정확히 표현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또 바울의 칭의론의 한 구성 요소인 율법의 문제에 대해서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도
간략히 그러나 정확히 지적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때
나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 그리스도의 구원을 칭의론의 범주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얼마 전까지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와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했던(참조.
갈 3:10~12에 인용된 신 27:26과 레 18:5) 유대 신학자 바울이 율법을 이렇게 도리어 죄와
죽음과 연대해 있는 사탄적 세력으로 규정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사실, 이전에 유대 신학자였던 바울이 율법의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