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6 - 칭의와 성화-김세윤
P. 76
그러나 신학사에서는 현재 의의 열매를 맺어 감을 성화의 과정이라 지칭하고, 그것을 칭의
뒤에 오는 구원의 한 과정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것은 바울의 성화의 언어 사용법과 맞지 않는 것입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칭의를,
복음을 받고 믿어 ‘무죄 선언됨/의인이라 칭함 받음’이라는 법정적 평면에만 적용하고, 그
것이 함축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감,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됨’의 관계론적
평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를 구원의 세 단계들(과거, 현재, 종말)에 다 적용되는 범주로 이해하고, 칭의
의 현재 단계는 회복된 의로운 관계에 계속 ‘서 있음’, 즉 ‘하나님/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를 계속 받아 감, 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기’의 단계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울의 가르
침에 보다 적합합니다. 이와 같이 전통 신학이 말하는 ‘성화’는 칭의의 구조 속의 현재적
삶을 지칭하는 또 하나의 동의어적 어휘이지, 칭의와 구조적으로 분리된, 칭의 다음에 오
는 구원의 단계가 아닙니다.
3) 칭의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의 장점들
‘칭의’를 믿는 자 된 순간부터 현재를 거쳐 최후의 심판 때까지의 구원의 전 과정을 포괄적
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으로 이해해
야지,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론에 의거하여 믿는 자 된 순간에만 적용하고, 그 후에 ‘성화’가
있는 것으로 논하면, 칭의의 현재적 과정(전통적인 신학이 말하는 ‘성화’의 과정)이 등한시
됩니다. 그러면 윤리(의로운 삶)가 없는 칭의론이 되고 맙니다.
한국의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대다수 신자들은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이미 의인으로 칭함 받음에 자만하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것을 예정론과 성
도의 견인론으로 뒷받침하여 구원파적 안일에 빠지기까지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태초
부터 구원받을 자들을 선택하여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하시고, 그 예정에 따라 구원하신 자
들은 끝까지 지켜 주신다고 하는데,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덕 입어 이미 의인이라 칭함 받
았으니, 나는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이고, 그러기에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 때까지 나를 지
켜 주시리라. 그러니 나는 이제 어떤 경우에도 구원의 확신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이 말은
대개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암묵적으로 내포함)라고 여깁니다. 구
원파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이 복음의 진리라고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주장하는 모양입니
다. 그러나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말하는 많은 정통 목사들도 사실상 이렇게 가르치는데,
그들은 좀 슬그머니 가르친다는 차이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목사들이 가르치는 칭의
론은 ‘의인으로서의 삶이 없이도 의인으로 자처하기’가 되어 버립니다.
어떤 진지한 성도들은 칭의 된 후에는 꼭 성화가 있어야 한다면서 거룩한 삶에 열심을 냅
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화를 위해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죄 짓지 않고 양심적으로 살
려고 하며, 사랑을 많이 실천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삶을 ‘칭의’의 현재적 과정으로 이해하
지 않고, 이미 칭의 된 자들로서 자신들이 장차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게 된다는 생각과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즉, ‘성화’를 상급 신학의 구도 속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
금 한국 교회에 만연된 구원론의 구도입니다. “구원(칭의)은 은혜로 모든 믿는 자들이 이미
받은(또는 받기로 확정된) 것이다. 그들 중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들은, 다시 말해
성화에 열심을 낸 사람들은 구원에 더하여 ‘상급’을 받는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도들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공로와 상급 신학에 빠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