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2 - 칭의와 성화-김세윤
P. 82
주의’와는 반대되는 이스라엘 ‘특수주의’를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렇습니
다. 그런데 놀랍게 마태와 바울이 일치하는 점들이 많습니다. 마태도 결국 28:18~20에서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야 한다는 주의
명령을 달고 있습니다(마태는 예수의 탄생 기사에서 동방박사 이야기로 그것을 미리 암시
하기도 합니다).
또 마태와 바울만 같이 쓰는 언어 하나가 ‘의’입니다. 바울이나 마태가 그 말을 결국 같은
뜻으로 쓰는데, 포커스를 약간 달리하여 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칭의론을 펼치면
서 의의 개념을 주로 ‘무죄 선언받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함’에 초점을 맞추어
쓰면서 그것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마태는 그 개념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간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계속해서 받
고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쓰면서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그
들이 ‘의’를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도 칭의의 현재 단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
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된 자들(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자들)은 이중 사랑 계명
으로 요약된 ‘하나님의 법’/‘그리스도의 법’을 지킴으로써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이것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된 그의
제자들은(마 5:1~15) 그리스도가 완전히 계시한 율법(바울의 언어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히 지킴으로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를 이루어야 함을 요구하
고(마 5:17~20), 그 ‘그리스도의 법’을 이중 사랑 계명 중심으로 펼치면서(하나님 사랑: 마
6:9~11, 6:19~34; 이웃 사랑: 마 5:21~48; 6:12, 14~15 등), ‘선한 열매’를 맺을 것을 요구하
는 것(마 7:15~20)과 같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6:33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 노력하라, 그리하여 의를 이루려 노력하라”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구원
을 약속받은 자들(마 5:3~11, 이것이 이른바 ‘8복’의 진정한 의미임)은 하나님의 통치를 실
제로 받음으로써 의를 이루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아빠께 의지하고 순
종하며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으로써 ‘선한 열매’를 맺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의의 열매’와 연결시키기보다는 방언이나 예
언을 하고, 환상을 보거나,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는 등의 신비스런 체험과 연결
시키며, 그런 체험들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은 미신적이 되어서,
‘성령을 좇아 삶으로써’ 의를 이루려는, 즉 개인적으로 정직하고 사랑이 풍성한 사람이 되
려 하며 사회적으로 인권을 증진하고 정의와 화평을 도모하려는 윤리적 노력은 등한시하
는 경우가 흔합니다. 제가 여러 학자들이 함께 집필하여 최근에 출판한 책에서 이것을 한
국 교회의 신학적 빈곤의 한 현상으로 지적하였으므로, 여기 몇 문단들을 인용하고자 합니
다.
한국 교회는 신학적 빈곤으로 말미암아 한국인들의 심령 속 깊이 자리 잡은 샤머니즘을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복음을 샤머니즘적으로 왜곡하여 미신적 영성을 조장하고 있다.
신학적 분별력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범상의 체험에서 벗어난 신비스러
운 현상들로 이해하면서 그런 현상들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역사를
구분하는 법을 일러 주고(고전 12:1~3), 성령의 역사를 빙자한 어떤 신비스런 현상도 그 법
에 따른 비판의 과정을 통하여 수용하라(고전 14:29; 살전 5:19~22; 참조. 요일 4:1~3)고 가
르치며, 성령에 따라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자세히 가르치는데(롬 8장; 갈 5장;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