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5 - 부안이야기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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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됐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후손으로 양부 김현채(토 죽막동유적의 역사적 의미와
마스)는 김대건 신부의 조카였다. 박해로 인해 부안으
로 피신한 김양배 회장은 등용리 일대의 땅을 매입해 활용방안 학술대회 열어
친척과 신자들을 불러들였다. 이에 따라 1903년경 15
가구에 50여 명의 신자들이 거주하는 교우촌이 형성
됐다.
이후 1918년에 성당과 사제관 건축을 마치고, 12월
11일에 초대 대구대교구장 드망즈 주교 주례로 성모
칠고를 주보로 정해 성당 축복식을 가졌다. 1926년에
는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 초대 주임으로 이기수(야
고보) 신부가 부임했다.
하지만 본당이 외딴 지역에 위치한 불리한 여건이었
다. 이에 따라 1935년 부안읍으로 본당을 이전해 등용
본당은 다시 공소가 됐다. 한국전쟁 당시 천주교 신자
마을이라는 사실을 안 인민군들이 마을에 불을 질러
전체 가구 절반이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공소 건물 9월 13일 오후 부안군청 중회의실에서는 죽막동유
은 약간의 그을음을 제외하고는 피해를 입지 않고 보 적(사적 제541호) 지정 1주년을 맞아 죽막동유적의 역
존됐다. 사적 의미와 활용방안에 대한 학술대회가 개최됐다.
등용공소는 2010년 다시 본당으로 설정됐다. 현재 이날 대회는 권익현 군수를 비롯해 윤덕향 호남문화
의 본당 건물은 신자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1972년 재연구원장 등 약 100여 명의 관계자와 지역 주민들
새로 건축한 것으로, 약간의 리모델링 작업을 거쳐 지 이 참석한 가운데에 죽막동유적의 발굴조사 성과를
토대로 섬나라 일본 오키노시마 제사 유적과의 비교
금에 이르고 있다.<가톨릭신문 9/23>
를 통해 해양으로 동아시아의 해상교류 및 제사활동
을 고찰보고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준비하기 위한 방
안들을 논의했다.
유병하 국립경주박물관장의 ‘죽막동유적 발굴조사
성과’라는 기조 강연을 시작으로 우재병 충남대 교수
의 ‘죽막동유적과 일본 오키노시마유적’, 이종철 전북
대박물관 학예사의 ‘한국의 제사유적’, 심승구 한국체
육대 교수의 ‘죽막동유적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의 현
황과 발전’, 양영관 전주대 교수의 ‘죽막동유적을 활용
한 관광 활성화 방안’ 등 다양한 주제로 연구한 내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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