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 - 부안이야기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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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염소에서 비롯된 땅이름이다.
궁안삼간평의 간척은 부안에서 비교적 일찍, 19세기에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간척
은 재력이 있고, 고을민의 동원이 가능한 궁방(宮房)이나
권력가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다. 이들에게 간척은 토
지확보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기에 하삼도(下三道;충청,
궁안마을 전라, 경상도) 해변의 니생지(泥生地)를 차지하고자 앞을
다투었다. 이들은 고을민을 징발하여 둑을 쌓고 그로부
터 얻어진 소득은 온전히 자신들의 소유로 하였기 때문
에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음을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에
서도 확인할 수 있다.
궁방이 간척사업에 관여한 사실은 부안에서도 확인된
다. 바로 궁삼간지역으로 예전에 부안현 서도면(西道面;
신흥마을 지금의 행안면 삼간리)의 지역이다. 이곳 해안에는 용동궁
(龍洞宮) 소유의 토지가 산재해 있었으며 바닷물에 의한
피해를 방지하고자 궁방전의 소작인을 징발하여 방조제
를 건설하고 매년 수리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朝鮮總督府
月報3(4, 1913))
궁안리(宮安里)는 궁답 안쪽이 되므로 생성된 땅이름이
다. 용동궁은 궁안리 일대 외에도 인접한 염소면, 상서면,
삼간마을 하서면, 남하면 일대에 밭 82두락, 논 2,718두 4승락, 대지
103두락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度支部 1911, 104-106)
용동궁 외에도 하서면, 상서면에는 육상궁(毓祥宮) 소유의 논 3017두락과 밭 152두 5승락이 분포하였으
며 도장은 최학영(崔學泳)이었다.(度支部 1911, 104-106)
조선총독부에서 1918년에 발행한 부안군 동진면, 행안면, 하서면 일대 지도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데 지금의 행안면 궁안-하서면 큰다리까지 쌓은 제방이 비교적 반듯하고 넓게 그려져 있다. 이 둑은 빈약
하여 해일로 무너지면 다시 쌓고, 또 무너지면 또 쌓았던 것이다. ‘삼간(三干)’이라는 땅이름은 이렇게 세 번
쌓아 완성했다 하여 생성된 땅이름이라고 한다.
이 둑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야 비로소 공고해지는데, 이는 일제가 쌀의 생산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
로 대대적으로 둑 보강사업을 펼쳤던 것이다. 그래서 해일 피해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었으나, 상습적인 한
해 피해는 어쩌지 못했다.
그 무렵 가뭄 때면 궁안-신흥-삼간리 일대 주민들간에는 물싸움이 자주 발생해 오죽하면 신문에도 기사
가 실릴 정도였다. 그래오다가 1970년대 계화도간척사업이 완성됨에 따라 섬진강 도수로 공사로 농업용수
가 자유로이 공급되고, 경지정리와 1972년 식수송수관이 시설되면서 물 걱정 없이 농사지을 수 있는 마을
이 되었다.
048 부안이야기·2018년/겨울/통권제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