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0 - 전시가이드 2023년 03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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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과 컨템포러리 아트
캄보디아 씨엠립 바이욘 사원 전경
단청 쌍봉황도와 어 있어 모두 216개로 추정되나 현재 사면탑은 37기만 남아있고 그 중 온전
한 얼굴 조각은 117개 정도라고 한다. 이 얼굴을 두고 바이욘 사원을 건설한
캄보디아 바이욘 사원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라 하기도 하고, 바이욘 사원의 복구 작업에 참여했
던 프랑스의 고고학자인 파르망티에(Henri Parmentier)는 관세음보살의 모
습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힌두교의 선신인 데바(Deva)와 악신
글 : 박일선 (단청산수화 작가) 인 아수라(Asura), 여신 데바타(Devata)를 표현한 것이라는 또다른 학설이
등장했다. 이 학설은 자야바르만 7세가 죽고 난 후 힌두교도가 불교와 관련
된 것들을 모두 훼손했음에도 사면탑만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설득력
캄보디아 씨엠립에 있는 바이욘 사원(Bayon Temple)은 크메르(Khmer) 제 이 높다고 한다.
국의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 재위 1181~1218년)가 앙코르 톰(An- 어쨌거나 사면탑의 얼굴 조각은 ‘크메르의 미소’라 불릴 정도로 크메르 제국을
kor Thom)의 중심에 세운 거대한 불교사원이다.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유명하다. 이 사원이 당시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
앙코르 와트(Angkor Wat)와 함께 크메르 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 다운 사원이었는지는 크메르 제국에 1년간 머물렀던 원나라의 사신 주달관(
로 손꼽히는데 정사각형으로 지어진 피라미드형 사원으로서 유네스코 세계 周達觀)이 쓴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 남아 있다. 그는 바이욘 사원이 아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적이다. 앙코르 시대라 함은 9~15세기의 강성했던 크 답기 그지없는 화려한 금빛 사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당
메르 제국 시대를 말하는데 초기에는 힌두교를 믿다가 중기 이후에는 국교를 시 바이욘 사원의 모습을 추측하면 사암의 겉면에 도금을 하고, 회랑 위에는
불교로 바꾸면서 뛰어난 건축물과 조각들을 남겼다. 이 시대에 세워진 앙코르 목조 지붕을 덮었을 것이라고 한다.
유적은 크게 앙코르 와트와 크메르 왕조의 수도였던 앙코르 톰으로 나뉘며, 바
이욘사원은 앙코르 톰의 핵심을 이룬다. 이곳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회랑의 부조 벽화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며 훼손
된 곳이 적지 않지만 동측과 남측의 벽화는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는 편이다.
바이욘 사원은 지리적으로도 왕도의 중심에 위치할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벽화에는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비롯하여 타이족의 한 부류인 참족(Cham)
신들이 사는 천상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을 의미한다. 자야바르만 7세는 과의 톤레삽 전투 장면이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다. 벽화의 대
크메르 제국의 국교를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꾼 왕이며 바이욘 사원은 본래 있 부분은 병사들이 창을 들고, 수레와 코끼리를 타고 진격하는 장면, 톤레삽에
던 힌두 사원을 증축해 만들었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7세가 죽은 후 자야바르 서 배를 타고 전투하는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하였으며 간혹 밥을 짓고 있는
만 8세가 즉위하고 나서 국교를 다시 힌두교로 바뀌면서 사원 내 많은 불상과 모습이나 아이를 낳는 여인들, 투계 경기를 하는 남자들, 물고기, 오리, 악어의
부처를 표현한 부조들이 훼손당했다.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튼 중국인과 귀가 긴 크메
르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 당시 생활 풍속이나 복식 등을 엿볼 수 있는 귀
사원의 구조는 중앙에 높이 42m의 본전이 높이 솟아 있고 제1회랑과 제2회 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본전을 비롯해서 사원 곳곳에 사면탑이 세워졌는데 모
두 54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탑의 네 면에는 각각 얼굴이 조각되 회랑을 걷다 보니 기둥에 새겨진 봉황(鳳凰)의 부조가 눈에 띄는데 표현된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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