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전시가이드 2021년 08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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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과 컨템포러리 아트




























        나주 금성관 전경(좌측 서익헌, 중앙 금성관, 우측 동익헌)













        나주에서 단청을                                        의 대표적인 석성(石城)으로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그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
                                                        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나주 읍성도
                                                        무참히 훼손을 당했다. 요행히도 읍성 안에 있던 건물 중 금성관(錦城館)은 사
        생각하다...금성관                                      라지는 비운을 면할 수 있었지만 살아남았기 때문에 나라를 잃은 설움만큼이
                                                        나 갖은 수모를 다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 시대가 되면서 건물의 많은 부분이 개조되어 군청사로 쓰였는데 해방 이
        글 : 박일선 (단청산수화 작가)                              후에도 군청사로 계속 사용되었다. 벽체와 바닥, 천장 등이 크게 변형되는 모
                                                        진 수모를 당하면서도 큰 틀의 원형만 어렵게 유지되다가 마침내 제 모습을
                                                        되찾은 역사적인 건물이다.
        나주(羅州)는 한양을 닮았다고 하여 작은 한양, 즉 소경(小京)으로 불리며 조
        선 말기 1895년까지 전라도 남부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었다. 원래 백제     금성관은 나주의 옛 지명이 '금성(錦城)'이다 보니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 시대
        나 신라와는 독립적으로 600년 이상 존속하였던 마한의 중심지였으며, 이후       에 한양의 국왕을 향해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충성을 다짐하는 망궐례를 행
        백제 때는 발라군(發羅郡)이라고 하였는데 신라의 경덕왕 때 금성군(錦城郡)       하던 객사의 정청 건물이었다. 조선 초기 목사 이유인(李有仁)이 건립한 것이
        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인 940년(태조 23년)에 지금의 나주라    라고 하는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3년(선조 36년)에 크게 중수하였고, 1884
        는 지명으로 고쳐지면서 983년(성종 2년) 나주목(羅州牧)으로 격상되어 전국     년(고종 21년)에 목사 박규동(朴奎東)이 또다시 중수하였다고 한다. 일제 시
        12목 중 하나가 되었다. 이때 목이 된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첫 글자를 따  대에 많은 부분이 변형되고 해방 이후에도 되돌려지지 않았던 구조를 1963년
        서 전라도(全羅道)라는 고유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1895년(고종 32년)까지 천   보수를 거친 다음 1976년 완전 해체 후 원형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
        년 가까이 목의 지위를 유지하게 된 나주는 2군 8현을 거느린 커다란 고을로      다. 이후 금성관 복원 정비 사업으로 금성관 앞을 가리고 있던 나주군 청사를
        거듭 발전하면서 나주 읍성이 형성되었다. 성은 나주 관아를 중심으로 남내,       헐고 2004년부터 2008년까지 금성관의 양옆으로 서익헌과 벽오헌(碧梧軒)이
        성북, 금남, 향교동 일대를 돌로 성곽을 쌓아 축성하였다. 성 안으로 드나드는     라 불리는 동익헌을, 2007년에는 정문인 망화루(望華樓)를 함께 복원하여 현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동쪽에 동점문(東        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漸門), 서쪽에 서성문이라 불리는 영금문(暎錦門), 남쪽에 남고문(南顧門), 북
        쪽에 북망문(北望門) 등 4개의 성문을 설치하였다. 조선 초기 목사 김계희가      건물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97평 규모로서 조선 시대 객사 건물 중에
        부임하던 때인 1457~59년 사이에 축성한 것이라 하며 둘레가 3.7㎞, 면적은   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팔작지붕을 하고 있어서 일반적인 맞배지붕의 다른
        97만 2,600여㎡가 되었다고 한다.                           정청과 비교하여 특이한 점이기도 하다.
                                                        건물의 규모가 웅장하다 보니 18본(本)의 외진주(外陣柱)와 8본의 내진주(內
        이 성은 한양 도성의 축소판 같은 사대문과 객사, 동헌 등을 고루 갖춘 전라도     陣柱)를 세워 육중한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 원기둥은 배흘림이 아닌 상하 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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