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9 - 2019년09월전시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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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 쿠사마의 빨간 호박, 나오시마 집프로젝트-1
이우환 미술관의 야외설치작품(2) 트리엔날레 전시장 중 일부
혼무라 항에서 배를 타면 나오시마 다음으로 아트 프로젝트가 많이 있는 데 조선의 양반들은 중인계급을 하찮게 봤고 도공을 하인처럼 다뤘다. 화원 화가
시마 섬에 갈 수 있다. 데시마에는 세토내해을 조망하는 작은 계단식 밭에 위 들 역시 아무리 탁월한 기교를 가지고 있어도 양반들의 기교라고는 없는 그림
치한 데시마 미술관이 있는데 대지미술을 건축으로 표현했다는 느낌을 받을 보다 더 못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작품의 형식적인 완성도
수 다. 30년 전에 문을 닫은 옛 바늘제조공장이 예술가의 손에 의해 예술작 보다 문기(文氣)기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동시대 일본의 지배계층은 무사계
품으로 거듭난 바늘공장 아트 프로젝트를 비롯한 다양한 체험 프로젝트를 경 급인 사무라이였는데 그들은 조선의 지배계층과는 다르게 예인들을 대했다.
험할 수 있다. 오늘날 일본과 한국 미술의 수준 차이는 국민들이 예술가들에 대한 태도와 처
우에서 기인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자의든 타의든 왜인들에게 끌려간 조선
개인적으로 나는 일본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일본미술에 대해서 의 도공들은 조국에서 그리도 천대받고 누추한 삶을 살았지만 일본에서는 예
는 호의적이다. 특히 그들이 예술과 예술가들을 대하는 태도나 한 기업이 경 인 대우를 받으며 좋은 집에서 밥 걱정하지 않고 살았다.
제적인 수익을 떠나서 예술과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그 결과물을 시민들이 누
릴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고 있는 점은 배우고 싶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들이 혼을 담아 제작한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해서 번 돈으로 일본은 군수자
국제적인 미술계에서 한국은 경제적인 수준에 비해 그리 높은 위치를 점하고 금을 마련해서 대동아전쟁을 일으켰다.조선 사회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도
있지 않다. 부단히 노력하는 중인데 감정적으로 일본이 밉다고 그들에게서 아 자기 기술자들의 재능을 아끼고 인간적으로 대우해줬다면, 또 당시 국제 정세
무것도 배울 것이 없고 교류하지 않고 협업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우리 미술계 를 잘 읽어서 군사력을 강화시켜 일본의 침입을 막아냈다면, 비극적인 세계사
발전에 있어서도 손해면 손해지 이로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는 수정되었을 수도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일본미술도 우리보다 앞서 있고 더욱이 우리 미술의 근대 지금도 우리 사회가 미술가들을 대하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전업작가들이
적 양식이 일본에서 유학한 조선 미대생들에 의해 이 땅에 정착되었다는 사실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이유에서 이다.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작품을 많이
은 부인할 수 없다. 수년 전에 이 지면을 통해서도 썼지만 일본미술은 130년 사주는 것도 아니고 작품 판매와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최
전에 이미 유럽 미술계에 큰 영향을 주었고 현대에 와서도 영향력있는 작가들 저 활동비를 정부가 지원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말이다.미술분야에서 국제적
이 많이 있다. 그런데 일본이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조선에서 건너간 으로 일본보다 더 영향력있는 한국이 되고 싶다면 의식적으로 고쳐야 할 것들
중국화첩들과 조선의 도자기 기술자들의 공로가 크다. 도 많고 미술 선진국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열심히 배워야 한다. 이미 넘치
게 알고 있어서 배울 게 없다면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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