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 - 2019년02월전시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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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현 컬럼
(좌) 고뇌에 잠긴 마크 로스코 (우) 마크 로스코, 무제, 1970,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에스프리 누보 까지 그를 괴롭혔던 것인지 그의 생애를 역 추적해 본다. 마크 로스코는 1903
년 러시아 드빈스크에서 유대인 가족의 사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새로운 정신 당시 러시아 제국의 정치적 분위기는 유대인에게 유독 혹독했다. 아들들은 황
제의 군대에 징집당하기 일쑤였다. 이에 로스코 가족은 미국 이민이라는 결단
을 내렸지만, 미국에서의 삶도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유대인’이라는 꼬리표
는 여기서도 항상 따라다녔다. 애초 법학을 전공할 생각이었던 로스코는 장학
김구현(AIAM 미술 경영연구소 대표)
금을 받고 예일대에 다닐 만큼 학업성적이 뛰어났지만, 예일대의 엘리트주의
와 인종차별적인 분위기에 실망한 데다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겹쳐 2학년 때
자퇴하고 만다. 하지만 결국 차별 받고 박해 받던 젊은 유대인은 새로운 구원
1970년 2월25일, 유난히도 매서운 추위 속에서 세기의 천재화가가 스스로 생 의 길을 찾아낸다. 학교를 나와 1923년 어퍼웨스트사이드의 봉제공장지구에
을 끊었다. 면도날로 손목의 동맥을 잘라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비운의 서 일자리를 얻은 그는 우연히 미술학교인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 친구를
주인공은 마크 로스코. 그가 피범벅이 된 채 조수 스타인데커에 의해 발견됐 만나러 갔다가 미술에 눈을 뜨게 됐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예술가 로스코’의
을 때, 화실의 이젤에는 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핏빛처럼 붉은 색조 때문에 손 첫 걸음이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악조건들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 불
목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피로 그렸다고 해도 믿어질 만큼 강렬한 작품이었다. 구하고, 가난한 이민자 출신의 자존심 강한 반골 성향의 유대인 예술가 로스
죽기 한 달 전에 마치 그의 최후를 미리 직감한 듯, 붉은색으로 물든 자신의 영 코를 주눅 들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힘이 됐다. 그래서인지 마크 로스코 작업
혼을 반영시킨『무제』는 역설적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 중간엔 희끄무 초기에는 인물과 풍경에 주제가 집중되어 있다. 그러다가 결국 로스코는 예술
레한 선이 아로새겨져 있다. 마치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었던 상처를 암시하 이 돈에 좌지우지되며, 그림이 부자들의 초호화 저택을 장식하는 현실을 거침
는 듯. 그는 왜 이렇게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서글픈 그림을 남겨 놓은 채, 스스 없이 비난한다. 왜냐하면 경제적으로는 힘들지 몰라도, 로스코에겐 돈으로부
로 목숨을 끊었던 것일까? 터 예술의 순수함을 지킨다는 ‘우월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예술에 대한
자세는 그에게 당당함과 혈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에 대한 일화는 많다. 로
부검 결과 로스코는 항 우울제 과다복용과 이에 따른 중독으로 평소 고통 받고 스코는 브루클린 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학장과 격렬하게 다투고 곧바로 강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의사는 로스코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 내렸다. 그 사 일을 때려치우기도 했으며, 미술관 직원들과도 자주 언성을 높였다. 심지
의 나이 65세 때의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우울증이 죽을 때 어 그는 싸움 끝에 미술관 유리창을 박살내기도 했던 ‘문제아’였다. 그러나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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