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6 - 전시가이드 2022년 10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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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과 컨템포러리 아트




























       수어장대 전경



       수어장대(守禦將臺)와                                    후 18세기 중엽에 남한산성의 5개 장대가 모두 붕괴되어 터만 남게 되었으나
                                                      1751년(영조 27)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2층 누각으로 다시 세우며 안쪽에
       태평화(太平花)                                       는 '무망루(無忘樓)', 바깥쪽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 라는 현판을 걸게 되었
                                                      다. 무망루라는 현판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의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
                                                      頭禮)를 해야만 했던 쓰라린 굴욕을 결코 잊지 말고, 또한 아들 효종이 인질로
                                                      심양(현 봉천)에 끌려 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여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글 : 박일선 (단청산수화 작가)화
                                                      북벌을 도모하였으나 북벌을 이루지 못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며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어장대(守禦將臺)는 남한산성에서 현존 건물 중 가장 멋진 건물로 손꼽힌
       다. 수어청의 장수(將帥)가 군사를 지휘하던 군사시설로서 서쪽에 자리한 장      현 건물은 1896년(고종 건양 원년) 유수 박기수가 재건하였는데 익공계 양식
       대라는 의미에서 ‘서장대’라고 불렸었다. 서장대에서 수어장대로 부르게 된 연     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자연석으로 낮은 축대를 쌓고 장대석으로 한단 높여
       유는 1751년(영조 27) 2층 누각으로 다시 세우며 '수어장대(守禦將臺)' 라는   기단을 쌓았으며, 바깥 둘레 기둥에는 8각 주춧돌을 놓았고 안쪽 둘레의 기둥
       현판을 걸면서 부터이다. 해발 453m의 일장산(日長山) 꼭대기에 세워진 수어    에는 낮은 반구형(半球形) 주춧돌로 받쳤다.
       장대에 오르면 왜 이곳을 총 지휘본부로 삼았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       1층 평면은 정면 3칸과 측면 2칸을 구획하여 고주(高柱)를 세우고 주위 4면에
       작할 수 있다. 남한산성 서쪽을 모두 굽어 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위치     퇴칸을 돌렸으며, 실내 공간의 내부는 장마루를 깔고 판벽과 평난간으로 꾸
       하여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부터 성내를 지휘하는 장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몄다. 2층은 1층에 세운 고주가 그대로 올라가 4면의 바깥 기둥이 되면서 평
                                                      면의 비례가 급격히 줄어들어서 언발란스한 느낌이 든다. 창호(窓戶)는 2층에
       또한 역사적 의미로 살펴보면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친히   만 있으며 매칸마다 2짝의 판문(板門)을 달았고, 바닥 전체는 장마루를 깔았
       군사들을 지휘하며 청태종의 13만 대군에 대항하여 45일간을 항전하던 곳으      다. 공포를 살펴보면 1층에는 초익공이고 2층에는 2익공으로 되어 있으며, 첨
       로 남한산성 내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숙     차 끝은 모두 수서[垂舌]형으로 되어있다. 화반(花盤)과 운공(雲工)은 1층에는
       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 역대의 국왕이 남한산성을 찾을 때 반드시 수어  없고, 2층 평방 위에만 쓰였다. 용마루와 합각마루, 1층 추녀마루에는 용두(龍
       장대에 올라가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되새겼던 곳으로 또다른 의미가 있다.        頭)를 얹었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1
                                                      층의 북동쪽 칸에 설치되어 있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개축할 때 건립된 동·서·남·북의 4군데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이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후금에 등을 돌리는 친명      단청은 모로단청을 하였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과 이 일대를 지키는 수어청
       외교정책을 펴면서 전운이 짙어지고, 국내에서는 이괄(李适, 1587~1624)의   의 우두머리인 수어사가 지휘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단청도 궁궐 단청에 준하
       난으로 국정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에 조정은 전쟁에 대한 대비책으로 임금      는 모로단청을 하였다. 도리와 장여, 창방의 뺄목에는 태평화(太平花)를 빠짐
       과 조정이 대피할 수 있는 장소로서 왕실을 보전하고 한성의 수비를 위한 보장     없이 그려 넣었다.
       처(保障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남한산성이 한성에서 멀지 않고 방어 요      태평화는 사방으로 활짝 핀 꽃잎을 정면으로 보이게 그린 연꽃 문양, 즉 상상
       새로서도 적합하다고 판단되어 왕실의 보장처로 정해졌다. 1700년 즈음에 그     의 꽃인 보상화를 말한다. 천하가 태평하고 만사가 평안하기를 바라는 태평성
       려진 '남한산성도'에 따르면 당시에는 남한산성의 동, 서, 남, 북 각 방면에 4개  대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 단청 문양으로 주로 처마 부분의 도리, 장여, 추녀
       의 장대와 봉암성에 외동장대를 설치하여 5개의 장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등 큰 부재의 부리(마구리)에 먹이나 뇌록으로 바탕칠을 하고 태평화는 흰색
       수어장대는 지금과 달리 단층누각이었으며 서장대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의 호분으로 돋보이게 그려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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