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1 - 2019년05월전시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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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80×100cm  캔버스에아크릴  2019                    테무진  45×53cm  캔버스에아크릴  2019





            경은 내 영혼에 스며, 가끔은 내 혈관 속에도 차갑고 푸른 무언가가 흐르는 듯     에서 가장 신령스러운 동물에 대한 예찬이다. 설표는 실제로 지구상에서 가장
            한 환상을 느낀다. 눈으로부터 태어나 서리를 숨쉬는 존재들, 차가운 세계를       높은 지대에 살아가는 고양이과 맹수다. 중앙아시아의 고원, 하늘과 가장 가까
            살아가는 신령스러운 것들. 겨울산의 신들의 모습은 그렇게 하나씩 내 마음으       운 곳에 살아가는 이 맹수는 워낙 은밀한 습성 탓에 실제로 ‘산의 유령’이라 불
            로부터 태어났다. 나는 어릴 적부터 민화 속 산신의 모습을 좋아했다. 큰 호랑     리운다. 그 고귀함과 아름다움으로 인해 밀렵의 대상이 되어 이제 지상으로부
            이를 데리고 자연물들을 보살피는 지혜로운 신의 존재는 무언가 마음의 평화        터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몸이 다 빠질듯한 설원을 헤치고 나아가는 어린 설
            를 주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시각화된 산신의 모습보다, 실제로 야생의 세계      표의 그림은, 척박한 환경과 인간의 위협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신령한 동물에
            를 접하며 느끼는 산신의 존재는 훨씬 강렬했다. 그것은 푸근하고 화사한 민화      대한 애가哀歌이기도 하다. 이런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한동안 기법적인 혼란
            속의 인자한 할아버지가 아닌 냉혹하고 매혹적인 동물 신의 모습에 가까웠다.       을 겪기도 했다. 이전의 내 그림들은 선명하고 다채로운 원색 위주였고,피사
            4월까지도 눈이 내리는 대관령의 산 속에서 야생동물과 식물들에게 삶과 죽        체의 윤곽석을 또렷하게 강조하여 형태감이 두드러졌다. 그런 방식은 팝아트
            음은 늘 맞닿아 있고, 겨울에는 특히 더 그러하다. 혹독한 냉기와 처절한 굶주     적인 발랄함을 표현하기에 좋았지만 ‘겨울산의 신’과 같은 신비로운 주제에는
            림을 이겨내 봄을 맞고 자손을 남기는 야생 생물들을 보면, 그 강인함에 경이      적합하지 않았다. 결국은 수묵담채화를 그리듯 아크릴 물감을 아주 묽게 희석
            로움을 느낀다. 그들 스스로는 자신의 존재에 경이를 느끼거나 도취되지도 않       하여 수많은 붓질로 톤을 쌓아나가는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주인공인
            을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타오르는 생명의 불꽃일 뿐. 겨울은 그     고양이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오히려 배경이
            런 생명의 의지가 가장 강하게 발휘되는 때이다. 인간인 나에게 그들의 침묵       었다. 미묘한 속삭임 같은 눈안개와 설원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는 그런 동양
            과 의지는 어떤 숙연함마저 느끼게 했다.                          화 기법 같은 방식이 적합했다. 결과적으로는 서양화 재료로 그린 동양화인 셈
                                                            이다.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작업방식이지만, 결과물은 동양화적 느낌이 나
            나는 이전에도 도시에 살며 오랫동안 고양이를 그렸는데, 그때의 고양이는 예       면서도 종이에 그린 것보다 내구성이 뛰어나 만족스러웠다.
            쁜 꽃이나 소품들과 함께하는 애완의 존재였다. 이곳에서 9번의 겨울을 나면
            서 나의 고양이들은 차가운 야생의 세계로 나가게 되었다. 인적이라고는 없        겨울이 지나 눈이 녹으면, 숲에서는 겨울에 스러진 동물들의 잔해를 마주친다.
            는 침묵과 고독의 세계, 흑과 백의 차가운 수묵화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야생      창백하고 고요한 백골, 그 어디에 생명이 머물렀던 흔적이 있었나, 한참을 먹
            의 동물이 된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 그림의 의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먹한 감정에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백골을 뒤덮으며 돋아나는 풀들을 보면,
            의 자연신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비로         생명의 순환 속에 이 뼈의 주인이었던 자도 다시 돌아오겠지 생각한다. 그 무
            소 그 꿈에 조금 다가간 것 같다. 나의 그림이 내가 생명을 이해하고 표현하      심하고 거대한 순환 속에서 차갑게, 그러나 가장 뜨겁게 빛나는 생명의 불꽃
            는 방식이 되었다.                                      들 – 아마도 그것이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신의 모습이든, 짐
                                                            승의 모습이든 자신의 존재를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모습은 다 신령스럽다. 그
            마녀, 요정, 산신 등 여러 캐릭터의 고양이들은 모두 차가운 세계를 살아가는      리고 그 모습은 백마디의 말보다도 더 큰 웅변이다. 수많은 잡념과 나약함에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들로 표현되었다. 그들의 새파란 눈동자 속에는 차갑고        빠진 나의 의지를 일깨워준다. 그래서 나는 늘 내 마음 속 눈오는 풍경을 향해
            깨끗한 대관령의 하늘이 담겨있다. 특히 애정을 갖고 그린 설표 그림은 지상       기도한다. 겨울산의 신. 그 차갑고 강한 힘을 내게 나누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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