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5 - 2019년05월전시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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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추경 116.8×80.3cm
설악 72.7×60.6cm
설악산의 진면모를 고스란히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 김 작가의 노력은 아주 특
내림골 116.8×72.7cm
별하다. 새벽 4~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목욕하고, 늦어도 7시면 그리기 시작
한다. 물론 사시사철 현장사생을 고집한다. 특히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설악
산의 기묘한 에너지가 발산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쓴다. 새벽은 밤
의 정기와 여명의 기운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휴식 없이 인간의 본성이 건강
할 수 없듯, 원초적 땅도 순결한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만 보다 더 경이로운 아 작을 탄생시킨다. “예술은 순수한 마음을 완전히 바쳐야만 그 결실을 볼 수 있
침을 선사할 수 있다. 김정호 그림이 지닌 생동감의 비밀 역시 그 ‘찰나를 스치 는 사제직 같은 것”이란 세잔의 말처럼, 수많은 시간과 인내력을 쏟아낸 결과
는 낙원의 빛’을 잡아내는 것이다. 이다. 그런 면에서 김정호에게 설악산의 의미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장
이처럼 설악산 혹은 인근 풍경을 담은 그림 중에 최근엔 울산바위 연작이 눈 에서 명석함과 정밀함으로 신중하게 선택한 색들은 극적인 하모니로 캔버스
길을 사로잡는다. 빛을 쫓는 해바라기처럼, 설악산의 울산바위를 여러 시점과 의 진동을 깨우고 있다.
계절이나 시간대에 반복해서 포착한 그림들이다. 이 울산바위에 대한 에피소 김정호와 세잔의 닮은꼴은 또 있다. 그의 그림에서도 원근법은 중요하지 않
드를 알면 속초에 작업실을 둔 김정호 작가와 울산바위의 숙명적인 만남이 더 다. 원근법은 물체가 멀어질수록 작아져 점으로 소실된다는 원리이다. 이것은
욱 흥미롭다. 먼저 울산바위는 울산에서 금강산으로 가려다 주저앉게 된 바위 평면에 입체를 옮겨야 하는 건축설계도에서 시작했다. 이 원근법은 1400년대
여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한편으론 설악산에 친 천둥소리가 바위산에 부딪히 르네상스 시대 이후 회화에 적용됐다. 400여년 흐른 인상주의 시대에서야 화
면 마치 울부짖는 듯 소리를 낸다하여 ‘울산’ 혹은 하늘의 사자울음소리로 빗 가의 눈으로 본 햇빛의 변화에 주목했다. 원근법을 벗어나려는 노력의 결과
댄 천후산(天吼山)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더 솔깃한 여담이 하나 더 있다. 는 바로 세잔에 의해 완성된다. 이성보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감흥은 풍성
울산 현감이 설악산에 주저앉은 울산바위를 빌미로 신흥사 주지에게 매년 세 한 색감으로 감각적이면서도 영혼이 깃든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색을 이루
금을 받아갔는데, 한 동자승의 기지로 그 세금을 면하게 된 이야기이다. 고심 는 수많은 조각들로 덧입히거나, 전통적인 명암법 대신 인위적인 명암을 만들
하는 주지를 대신해 동자승이 울산 현감에게 “바위를 도로 가져가든지, 아니 고, 선과 색채로 자연 원성의 형태와 기운을 눈앞에 입증해주고 있는 셈이다.
면 바위가 앉은 곳의 자릿세를 내시오”라고 하자, 울산 현감을 ‘재로 꼰 새끼’로 김정호의 그림엔 설악산과 그 주변의 사계절 풍경이 담겨 있다. 연초록의 풋
묶어주면 가져가겠다고 했다. 동자승은 다시 꾀를 내어 소금물을 입힌 풀로 새 풋한 봄 정경, 짙푸른 녹음의 여름 향취, 오색단풍 절경의 설렘, 흰 눈으로 뒤
끼를 꼬아 바위를 묶은 후 겉만 태워 재로 꼰 새끼로 묶은 것처럼 꾸몄다. 결국 덮인 고졸미 등 어느 하나 놓치면 안 될 장면들이다. 그런데 한참을 바라보고
울산 현감이 두 손을 들게 된다. 그래서 지금의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를 한자 있으면 그런 계절감들은 무의미해진다. 오히려 그 모든 풍경의 시점이 하나로
로 ‘묶을 속’자와 ‘풀 초’자의 속초(束草)라 부르게 된 것이다. 느껴진다. 눈처럼 눈부신 벚꽃 향연이나, 새벽의 싱그러운 태양빛을 품은 산
줄곧 설악산과 울산바위 그리기에 천착하는 김정호 작가를 보면 후기인상파 이나 도심 풍경은 낯설지 않게 한 몸으로 엮인다. 그것은 김정호 작가가 어느
의 대가 폴 세잔(Paul Cézanne)이 연상된다. 세잔은 중년이후 고향인 엑상프 곳, 어느 시간에 있든 눈앞의 풍경을 마음으로 그린 심실경(心實景)이기 때문
로방스 근처에서 혼자 생활하며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특히 생트 빅트와르 이다. 오로지 현장사생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던 김정호의 진정성이 보는 이
산의 독특한 모습에 사로잡혀 특유의 노력으로 미술사적 기념비로 기록될 연 의 마음속 망막에 어김없이 투영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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