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 - 2020년1월 전시가이드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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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현 컬럼
세르누치미술관의 마엘 밸렉 수석 큐레이터에 의해 소개되었던 고암 이응노화백의 말년작품 군상, ⓒADAGP
에스프리 누보 한지 1년이 지나자 고국에서의 전시회에 초대를 받는다. 그러나 당국에 의해
입국은 거부되었고 노 화백은 ≪호암갤러리≫에서의 전시회에 참석할 수 없
새로운 정신 었다. 결국 주인 없는 전시회가 열렸을 그 무렵, 급기야 파리에서 충격 받은 노
화백은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어쩌면 고암의 인생 자
체가 끝없는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 아니었는지. 고암의 도불 결심에 결정적
글 : 김구현(AIAM 미술 경영연구소 대표) 역할을 한 나혜석 역시 필연적인 인연에 의해 만남이 이뤄졌다.
이혼 등의 고초를 겪은 나혜석이 1934년 이혼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수덕사
1989년 1월 10일, 한 많은 한국의 노 화가가 머나먼 프랑스 땅에서 운명을 달 에서 수행 중이던 친구 일엽 스님을 찾아왔다. 나혜석은 당시 수덕사 만공 스
리했다. 고국에서의 마지막 전시회를 앞두고도 귀국할 수 없었던 고암 이응 님에게 출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스님은 “임자는 중 노릇할 사람이 아니야”라
노 화백. 단지 한국동란 때 헤어져 이북에 살아 남아있던 아들을 유럽주재 북 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나혜석은 수덕사에 장기 체류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한대사관의 주선으로 만나러 갔다는 정치적 이유만으로. 그렇게 시작된 이념 나혜석은 작품활동을 하며 선승처럼 단촐하고 조용하게 살면서 승복을 입고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 군사정부의 덫에 걸린 거물급 화가의 혹독한 옥살이.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고 자신을 찾아오는 예술인들을 만
그를 구명하기 위한 서양 지성들의 활약으로 석방되어 다시 도불. 그러나 꼬 나며 5년 정도 머물렀다. 바로 그 무렵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
박 10년이 지나 또 한번의 간첩사건에 연루되자 고국에서는 더 이상 그의 미 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노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술품을 전시하거나 취급하지 않겠다는 미술계의 선언이 줄을 잇는 사단이 벌 하고 돌아온 나혜석이 이곳에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그림에 대한 공부를
어지고 만다. 하고자 이곳을 자주 왕래했다. 결국 이응노에게 나혜석은 파리 신문물을 알려
준 인생 선배이자 그림에 대한 대단한 스승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주 수덕여
조국에 의해 버림받은 고암은 오랫동안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프랑스로 귀화 관을 찾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를 결심한다. 그렇게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서야 이북의 아들과 재회할 수 있
었다. 조국에 의해 버림 받은 지 또 한번의 10년이 흘러서야. 북의 아들과 재회 서양화에 대한 대 선배이자 스승이면서 나이로는 누님과도 같은 그와 많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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