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85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P. 385

선조(宣祖)  때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  척주군(陟州君)  김공

                       (金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김공의  휘는  양보(良輔)요  호는  송
                       봉(松峰)이며 본관은 삼척이다. 선조가 봉 받은 이 삼척을 본관으로 삼아 대대로 이어

                       오고  있다.  가정(嘉靖)  갑인년(一五五四)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조(宣祖)  때  벼슬해
                       임금의  대우가  융숭했다.  임진년  어가(御駕)가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할  때  공이  공
                       경(公卿)과 조정 대신들과 함께 모시고 가면서 잘 받들었다. 그때 명나라 군사가 국경
                       에 와  있어서 서울이 거기에 힘입어 안정되었다.  이듬해 계사(癸巳)에  어가가  환도(還

                       都)하니 이 七, 八년 동안에 걸쳐 나라가 안정된 날이 없이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아서
                       八도가 극도로 피폐해 있었다. 그러다 경신년에 이르러 하늘이 도와 나라의 형세가 조
                       금 펴져 신하들이 충성을 다하고 군사들이 힘을 다해 나라가 마침내 안정되었다. 갑진
                       년(一六0四)에  이르러  임금이  중외에  반포하여  一0년  동안  미처  베풀지  못했던  은전

                       (恩典)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에  신에게  고하고  사직(社稷)과  악독(嶽瀆)의  신령에게
                       고하고  공신록권(功臣錄券)을  만들어  왕부(王府)에  보관하고  호성훈(扈聖勳)을  등급을
                       두어  정하여  공에게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자
                       헌대부(資憲大夫)  척주군(陟州君)에  봉하고  노비(奴婢)와  구종(驅從)  약  간  명  및  전답

                       과  은자(銀子)  비단,  말  등을  하사하니  은전(恩典)이  매우  후  했다.  공신녹권이  나라
                       사서(史書)에 실렸다.

                        이에  공이  벼슬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와  고을  북쪽  二0리  되는  동회(桐淮)  동쪽에

                       다  새로  내외  객당(客堂)을  짓고  그  하나는  종족들과  친하게  지내는  장소로  삼고  또
                       하나는  벗들과  강신(講信)하는  장소로  삼았다.  그리고  또  동쪽에다  돈대  하나를  쌓아
                       매년  봄,  가을로  고을의  선비들과  음사례(飮射禮)를  행하여  태평한  시대의  일을  행하
                       였으니 훌륭하다고 하겠다.


                        공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했으며  공손하고  검소했으며  또  성리
                       학(性理學)에 밝아 뜻을 돈독히 해 힘껏 실천하기를 늙도록 게을리 하지 않아 고을 사
                       람들이 더욱 공경하고 원근 사람들이 사모했다.  공이  천수(天壽)를  누리고 돌아가셨는
                       데  그  연대를  계산해  보면  지금으로부터  三백  몇  년이  된다.  상상하건데  그  화려한

                       자손들이 번성하지 못해서인지 묘소를 실전하고 공의 생 졸과 지난 유적(遺跡)이 모두
                       전해지지 않으니 탄식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지난 을해년에 후손 흥학(興鶴) 달호(達鎬) 원욱(源旭)은 유적이 실전된 것을 한탄하

                       여 추모재(追 慕齋)를 지흥산(智興山) 아래에다 지어 제사를 지내는 데 대비했다. 지난
                       을사년(一九0五)  큰  난리에  높다랗던  재실이  사라져  기둥만  안고  날마다  탄식하다가
                       다시 산 위에다 단(壇)을 설치해 해마다 망제(望祭)를 지냈다. 三년후인 무신(一九0八)

                       에  기영(麒滎)  정호(定鎬)  관호(寬鎬)  원도(源道)  준영(駿榮)  운영(雲榮)이  추모재를  효



                                                                    제5편  선조  행장·갈명기(先祖  行狀·碣銘記)  385
   380   381   382   383   384   385   386   387   388   389   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