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88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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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자영(自英)과 자남(自男)이 있으니 자남은 벼슬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이

                다.  七세를  전해  판의금(判羲禁)  휘  신기(神器)는  아들  셋을  두었으니  달로(達老)  부로
                (府老)  성로(成老)이니  막내는  함경북도  영흥(永興)으로  가서  거기에서  살며  자손이  번
                성하게  되었고  가운데는  병조참의(兵曹參議)이다.  부로의  증손  참찬공(參贊公)  호문(好
                文)이  산양(山陽)  진사(進士)  신여생(申麗生)의  딸에게  장가들어  자의공(自羲公)을  낳으
                니 호가 동명(東溟)인데 하위지(河緯地)의 동생 위기(緯貴)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공은  단종(端宗)때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벼슬을  지내셨다.  성품이  청렴  검소
                하여  스스로  절의(節羲)를  지켜  사육신(死六臣)의  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명(明)나라
                경태(景泰)  병자년에 벼슬을 버리고 의주(宜州) 용진현(龍津縣)으로  은거하여  그곳에서
                살게  되었으니  바로  실직군왕(悉直郡王)의  十三세손이다.  선대부터  벼슬한  집의  후손
                으로  크게  경사로운  일  없이  세상을  떠나  갑신년에  덕원부(德源府)  북쪽  용성(龍城)
                황석산(黃石山) 아래 임좌(壬坐) 기슭이다.


                  공의  아들  이지(爾智)는  은일(隱逸)로  은혜를  입어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
                曹參判)에  증직(贈職)되니  호는  석천(石川)이다.  전주이씨(全州李氏)  생진(生進)  율(律)
                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으니  계권(啓權)과  계윤(啓胤)이다.  공  역시  천수(天
                壽)를  누리고  돌아가시어  갑자년  아버지  묘  아래에  장사지냈는데  지문(誌文)이  있다.

                장자 계권은 통정대부(通政大夫)인데  나주(羅州) 박인문(朴仁文)의  딸에게  장가들어  대
                손(大孫)을  낳고  대손은  사림(嗣淋)을  낳고  사림은  개규(介圭)를  낳고  개규는  성발(聲
                發) 성원(聲遠)을 낳고 성원은 여광(礪光)을 낳고 여광이 극철(克哲)을 낳고 극철이 호
                익(虎翼)과 봉익(鳳翼)을 낳았다. 성원이 덕청(德淸)을 낳고 덕청이 태언(泰彥) 태래(泰
                來)를  낳으니  모두  음직(蔭職)에  보임(補任)되었으며  묘소는  각기  본부(本府)  용성(龍

                城) 땅에 있는데 다 표석(表石)이 있다. 둘째 아들 계윤은 충량(忠良)하여 벼슬이 통정
                대부인데  임공률(林公律)의  딸에게  장가들어  만석(萬碩)을  낳고  만석이  인걸(仁傑)을
                낳고  인걸이  덕보(德輔)를  낳고  덕보가  응류(應琉)를  낳고  응류가  태우(泰禹)  태순(泰
                舜)  태요(泰堯)를  낳으니  모두  충효(忠孝)하여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와  자헌대부
                (資憲大夫)에  이르렀으며  묘소는  각기  영흥(永興)  안불직동(安佛直洞)과  고원(高原)  낙
                동(樂洞)땅에 있으니 다 표석과 지문(誌文)이 있다.


                  이처럼  석천공(石川公)의  음덕(蔭德)이  후손에게  내려와  면면히  그  아름다움을  다
                기록할 수가 없는데 자세한 것은  묘표와 지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후세에 전하니  이것
                이  어찌  선대에서  후손에게  음덕을  남겨준  소치가  아니겠는가?  지금  김창율(金昌律)
                군이  그  선대의  행실과  이력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선대의  묘역과  묘표가  오래되어
                마모가 심해  다시  고쳐  세우고자  하니  비문을  써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내가  그

                정성을 생각하여 굳게 사양하지 못하고 이상과 같이 묘도문(墓道文)을 쓰는 바이다.


                기미년(一九一九)국추(菊秋)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이조판서 겸 판의 금부사 지춘추관사 경연일강관
                            홍문관제학 규장각제학(行吏曹判書兼判羲禁府事知春秋館事經筵日講官弘文館提學奎章閣提學)
                                                                         청풍(淸虱) 김학성(金學性)은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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