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2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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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중 유좌(酉坐) 언덕이 바로 장사랑공 삼척김공 휘 언혜(彥惠), 자 안민(安民) 호
야은(野隱)의 무덤이다. 삼가 우리 집안의 세보(世譜)를 살펴보면 공은 신라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 삼척군(三陟君) 휘 추(錘)의 아들 삼한벽상공신 실직군왕 휘 위옹(渭翁)이
바로 공의 十三대조이다. 그분이 처음으로 삼척을 본관으로 삼아 자손들이 거기에 살
면서부터 우리나라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군왕의 둘째아들 삼중대광태사의 휘는 자
남(自男)이며 四대를 내려와 병조참정의 휘는 양좌(艮佐) 요 二대를 내려와 판의금의
휘는 신기(神器)요 그 둘째아들 병조참의의 휘는 부로(府老)이니 바로 공의 五대조이
다. 아들 여덟을 낳으니 일곱째의 휘는 수(隋)이니 공의 고조요 휘 순산(順山) 휘 석
성(碩成) 휘 응두(應斗)는 장사랑이니 바로 공의 증조와 할아버지와 아버지이다. 어머
니 단인(端人) 의성김씨(義城金氏)는 병의(秉羲)의 딸인데 아들 넷을 낳으니 공은 장자
이다.
공의 아버지 장사랑공이 후손을 위한 계책으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본받
아 비로소 삼척부 남쪽 맹방리(孟芳里)로 이사해 살면서부터 자손이 번성하게 되자 부
의 남쪽 적로리(積老里)로 분가해 살면서 남북파(南北派)가 된 것이다.
공은 천자(天資)가 뛰어나고 지조가 확고하고 굳어서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고 스승을 따라 공부하면서 가사(家事)를 돌보지 않았다. 만년에는 은거
하여 야은(野隱)이라 자호(自號)하고 산수 구경에 뜻을 두고 스스로 거문고를 타고 책
읽는 것을 즐겼으며 자제들에게 효제(孝悌)를 가르치고 하인들에게 농사를 가르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동회(桐淮)의 동생(董生)이요 반곡(盤谷)의 이우(李友:한퇴지(韓退
之)의 친구 이원(李原)을 말함)라고 일컬었다. 당시 세 중씨 계씨와 함께 항상 상체시
(常棣詩:형제간의 우애를 읊은 시)를 읊조려 형제끼리의 즐거움을 펴고 날마다 여러
벗들과 모여 무성한 소나무와 잣나무를 즐기며 우정을 돈독하게 하니 세상에 전하는
평천장(平泉庄:당나라 때 이덕유(李德裕)의 별장)이나 양가(楊家)의 즐거움만이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아, 공의 평생 뜻한 바가 이 한두 가지만이 아니었다. 선대의 제사를 극진히 받들면
서 매양 징험 할 만 한 문헌(文献)이 전하지 않아 선조의 묘역이 전쟁 중에 전하지
않은 것을 통탄하여 주야로 눈물을 흘리며 찾아 나섰으나 뜻만 있었지 찾지 못하였지
만 이런 사실을 보고 듣는 자들이 감동하고 또 백세 후 까지도 귀신과 사람이 함께
억울해 할 일이다. 배(配) 단인(端人) 여양진씨(驪陽陳氏)는 철(哲)의 딸인데 평소 부덕
(婦德)이 있어 공에게 시집와서는 규범(閨範)을 극도로 하여 양친을 기쁘게 하고 이웃
친족과 돈목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강주진씨(江州陳氏) 고가(古家)의 유훈(遺訓)을
잘 이었다고 칭찬했다. 공과 배위의 생졸 연월일은 징험할 만한 문헌이 없어 알 수
없으며 묘는 같은 언덕에 부좌(树左)이다.
392 三陟金氏 宗史 總覽 修訂增補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