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9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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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 살게 되어 그 숫자가 아주 많은데 우리 파는 실직군왕의 둘째 아들 고려(高麗) 삼
중대광태사공(三重大匡太師公) 휘 자남(自男)부터 병조시랑공(兵曹侍郎公) 휘 광립(光
立), 사공공(司空公) 휘 승련(承錬), 시랑공(侍郞公) 휘 지서(之瑞), 병조참정공(兵曹參
政公) 휘 양좌(良佐), 공조참판공 휘 보(寶), 판의금공 휘 신기(神器), 병조참의공 휘
부로(府老), 무공랑(務工郎) 휘 제(隰)요 학생공 휘 득소(得沼), 가선공 휘 광형(匡衡)
이요 가선공 휘 산우(山佑)를 거쳐 승정원 좌승지겸경연참찬관공(承政院左承旨兼經筵
參贊官公)이 휘 중강(重江)으로서 중조(中祖)가 된다.
공이 문학(文學)과 지혜가 뛰어나고 행실이 돈독하고 수신(修身)을 잘하여 시끄러운 세
상을 싫어하고 산수(山水)의 조용한 경치를 좋아해 평소 이름을 감추고 은거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때를 당하여 미리 난리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삼척
부 서쪽 미로면(未老面) 고천동(古川洞) 대판곡(大板谷)에다 집을 짓고 도토리를 줍고 칡
뿌리를 캐어 먹고 살면서 아침에는 책을 읽고 저녁때는 밭을 갈면서 후손들이 살아갈 터
전을 열어주었으니 그 청고(清高)한 지감(知鑑)을 따라갈 사람이 드물고 그 남긴 풍도와
유적이 노을처럼 골짜기에 애연하게 펴져서 사는 사람들이 김생곡(金生谷)이라 불렀으니
이 어찌 김씨들에게 난리를 피해 살아가도록 하려는 뜻이 아니었겠는가? 그 당시 율곡 이
이(李珥) 선생도 동방의 부자(夫子)로 한란이 일어날 기미를 미리 예측하여 미리 병기(兵
器)를 준비시키도록 하셨으니 지모(智謀) 있는 사람들은 어찌 이처럼 지략이 같은지 모르
겠다. 만약 공으로 하여금 율곡선생의 지위에 있도록 했으면 어떻게 미리 대비시켜 나가
서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들어와서는 대장부의 사업을 잘 처리했을지 모르겠다.
공이 만력(萬曆) 무오년 八월 十七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八十여 세였다. 사시던 대판
곡 자좌(子坐) 언덕에 장례했다. 배(配) 정경부인 순흥안씨(順興安氏)는 기정(奇貞)의 딸
인데 공의 묘소 청룡(靑龍) 기슭 자좌(子坐)에 장례했는데 비석이 있다. 아들 둘을 낳으
니 장자는 계인(繼麟)이요 차자는 기인(麒麟)이니 이분들에게서 남북으로 나뉘게 되었다.
공의 묘소에 전에 단갈(短碣)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마멸되고 이끼가 끼어 오래가
지 못하게 되어 자손 된 도리로 유감이 없을 수 없었다. 전 비석을 묘소 오른쪽에 묻고
다시 새로운 비석을 세우는데 각파 자손을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대개 공의 두 아들은
남북의 파(派)로 나뉘어 화수회(花樹會)를 하고 있으므로 그 줄기 선조를 열록(列錄)한
다음 이 일의 전말을 기록해 선조들이 당세에 혁혁(赫赫)했음을 알려 후손들로 하여금
후일 흠모하게 하여 영원히 전하도록 하는 바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공께서 이곳에 오시니 땅이 제 사람을 만났네. 이름 숨기고 행적 감추었으나 덕(德)
은 외롭지 않았네. 골짜기의 문을 굳게 닫아 병란(兵亂)의 티끌 이르지 않았네. 자손
들 위한 계책 훌륭하고 덕(德)을 쌓고 인(仁)을 행하여 자손들이 번창하네. 살던 곳에
장사지내어 지명(地名)이 더욱 유명하게 되었네. 저 산골짜기 바라보니 김씨들 빛이
나네. 선조를 계승해 후손에게 물려주니 효도가 영세토록 끊어지지 않으리라. 옛 비석
을 새 비석으로 바꾸니 이 비석 영원토록 전하리라.
숭정(崇禎) 후 여섯번째 갑자년(甲子年)(一九二四) 二월 상순에
회암(曝庵) 주부자(朱夫子-朱熹)의 二十九세손 주명승(朱明昇)은 공손히 씀.
제5편 선조 행장·갈명기(先祖 行狀·碣銘記) 3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