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01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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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 내려와 휘 승통(承統)은 성균진사(成均進士)이니 바로 공의 六대조요 전하여 휘
서(西)는 오위도통부부통관(五衛都統府副統官)이요 휘 한필(漢弼)의 호는 낙파(洛波) 또
다른 호는 소천(小川)이요 시호는 문충(文忠)이니 문과에 급제한 전적(典籍)으로 효행
(孝行)이 있어 어사(御史)의 천거로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며 일찍이 율곡선
생(栗谷先生)과 함께 봉사(封事)를 의논하여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지었다. 오랑캐가 육
진(六鎭)에서 난리를 일으키자 사신(使臣)으로 가 절의를 지켰으니 이분들이 고조 증조
할아버지 三세이다. 아버지의 휘는 효련(效錬)이니 문과에 급제한 기자전참봉(箕子殿參
奉)이요 어머니 최씨(崔氏)는 전주인(全州人) 진사 입근(立根)의 딸이다.
공은 천자(天姿)가 절륜하고 학식이 고명하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상공의 문
하에서 성리학을 강구하여 하늘과 사람의 일을 깊게 깨달았으며 도덕과 문장이 당세
의 유종(儒宗)이요 효심이 깊고 행실이 뛰어나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 사계(沙溪) 김장
생(金長生) 선생이 깊이 추장(推獎)하고 큰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인조(仁祖) 때 문과
에 급제하여 통정대부로 봉화현감이 되어 나가 정사가 청렴하여 백성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니 거사비(去思碑)와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기렸는데 가선대부 호조참판으로 승
진하였다. 금의환향(錦衣還鄉)하여 가봉산(佳峰山) 학현(鶴覘) 남쪽에 살면서 충효로써
자질(子姪)을 가르치고 예의와 믿음으로써 이웃과 사귀었다.『태극변설(太極辨説)』과
『전심록(傳心錄)』『유집(遣集)』세권이 전해 세상에 돌아다니고 있다.
본가에서 돌아가시어 북평읍(北坪邑) 용정리(龍井里) 봉화동(烽火洞) 임좌(壬坐) 언
덕에 장사지냈다. 불행히 가보(家譜)가 불에 타버려 공의 생졸 월, 일을 알 수가 없으
며 배(配) 정부인(貞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예조참의(禮曹參議) 영만(寧萬)의 딸로
현숙(賢淑)한 덕이 있어 시부모를 효성으로 모시고 남편을 공손히 받들어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는데 묘는 같은 언덕 부우(柎右)이다. 아들 둘이 있으니 장자 명길(命吉)은
숭록대부 예조판서인데 현풍곽씨(玄風郭氏) 대견(大堅)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예립
(禮立)을 낳으니 통정대부 호조참의요 차자 기삼(起三)은 좌랑(佐郞)이요 그 다음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무덤에 전에 비갈(碑碣)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풍우에 마멸되어 글씨를 읽을
수 없어 행적을 징험할 수 없게 되어 후손들이 마음 아파했다. 그 十三세 후손 동석(東奭)
(一八八九〜一九六六)은 효성이 지극한 분인데 공의 덕행이 민멸(泯滅)될까 염려하여 장차
다시 고쳐 세우려고 하면서 상중(喪中)에 있는 나에게 오래 사양했으나 되지 않아서 사실
을 뽑아 대략 써서 후일 잘 아는 분을 기다리기로 한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용정(龍井) 언덕에 소나무 잣나무 무성하네. 대를 이은 훈업(勳業)은 집안에 전해오
는 법도이네. 비석에 이끼가 기어 읽을 수 없어 자손들 상심하네. 효성으로 다시 세우
니 더욱 빛이 나네.
병인년(丙寅年) (一九二六) 五월 하순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찬정 학부대신장례원경시강원첨사
(議政府贊政 學部大 臣掌隸院卿侍 講院詹事) 완산(完山) 이재현(李載現) 지음.
제5편 선조 행장·갈명기(先祖 行狀·碣銘記) 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