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6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_ 101가지 성경 이야기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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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처와  첩의  갈등  이야기일까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창  21:8~11).



                   성경을  구속사의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어떤

               학파의  견해여서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  성경을  그렇게  읽으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요 5:39).  즉,  성경은  나의  신변잡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  교회는  성경  이야기를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거기에다  더해  지나치게

               윤리/도덕적으로,  혹은  모범적으로  읽으려는  경향이  강하고,  뿐만  아니라  성경의

               이야기를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찾아내기보다는,  설교하는  목사나  읽는  독자가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해석해  내어  읽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견해가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서의  성경읽기’를  방해합니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바른  성경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읽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부분에  경종을  울려  줄  좋은  본문이  ‘사라와  하갈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혹여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읽는다는  것에  대해  생소하거나,  아니면

               윤리/도덕적으로  읽는  것이  뭐가  잘못  되었느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  글이  아주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편의상  ‘아브람’, ‘사래’의  표기도  모두  ‘아브라함’, ‘사라’로
                                         1)
               표기하겠습니다).




               1)   화란에서  있었던  모범적  해석과  구속사적  해석  간의  논쟁에  대해서는  시드니
               크레이다누스,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권수경  역  (서울:  학생신앙운동, 1995)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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