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7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_ 101가지 성경 이야기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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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에서  행하는  통상적인  방식으로  이  본문을  읽으면,  아마도  다수의
               설교자들은  이  본문을  가지고  처와  첩의  갈등  이야기로  읽을  것입니다.  실제로  저도

               이것을  그렇게  해석하는  많은  설교들을  들은  경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늙어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이를  얻지  못하자,  아브라함의  본처  사라는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도록  합니다.  여종은  곧바로  아이를  갖게  됩니다.  본문의  조금

               앞쪽에  있는  창세기  16장에  보면  하갈이  잉태하자  본처인  사라를  핍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4절).



                   여기서부터  이미  재앙의  불씨가  시작되는  듯  보입니다.  자신의  임신을  믿고
               본처를  멸시한  하갈,  이에  대해  본처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절).


                   아브라함은  어떤  판단을  해야  옳을까요?

                   무엇이  옳건  간에  아브라함은  창세기  16장에서  사라에게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6절)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사라는  하갈을  학대합니다.  결국  하갈은  도망을  갑니다.

                   이런  상황을  신변잡기적으로  읽으면,  누가  잘못한  것일까요?  본처를  무시한
               하갈이  잘못한  것일까요?  아니면  본처인  자신을  무시했다고  학대한  사라가  잘못한

               것일까요?  아니면  우유부단한  결정을  내린  아브라함이  잘못한  것일까요?  이도저도
               아니면  아예  첩을  얻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른  것이었을까요?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본문이나  21장을  해석할  때,  아브라함이  첩을  얻은  사실

               자체에  원인을  둡니다.  그래서  이  본문들은  대개의  경우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이라는  주제들을  보통  달고  나오게  됩니다. ‘첩  얻어  가지고  잘될  리가
               있겠습니까!’라는  식입니다.


                   첩을  얻은  사실  자체가  옹호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정의
               화목을  가르치기  위하여  이  본문을  기록한  것일까요?


                   16장에서의  갈등은  여호와의  사자의  중재로  해결됩니다.  하갈이  도망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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