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3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_ 101가지 성경 이야기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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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진짜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량을  채워서  내
               뜻을  이뤄  보겠다고  하는  이  기도가  과연  성경적입니까?



                   두  번째  문제는  ‘행위주의’  혹은  ‘업적주의’의  문제입니다.  기독교가  언제부터
               로마  가톨릭처럼  인간이  업적을  많이  쌓으면  그것으로  인해  결과물을  얻는  종교가

               되었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언제부터  100일  치성을  드리면  그  치성드린  정성이
               쌓이고  쌓여서  기도가  응답이  된다는  개념을  갖게  되었습니까?  이런  생각은  지극히
               이교적입니다.


                   우리의  기도,  기독교의  기도는  인간이  얼마나  행위를  많이  쌓느냐에  따라  기도가
               응답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독소입니다.  이런  개념은  중세

               로마교회에서  수없이  행해졌던  것이며,  이로  인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개념이
               매장되었고,  사람들이  ‘자신의  선행을  쌓아  그것으로  구원을  얻어  보려고  하는’

               패악으로  치달았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은혜  안에서  소통하는  행위지,  기도라는

               행위를  많이  쌓는  것으로  인해  업적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탑돌이를  하거나,  수행을  쌓거나,  공을  들이면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까?  한국  기독교는
               불교입니까?  무속  신앙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문제  제기를  통해  ‘분량을  채워야  기도가

               응답된다’는  식의  개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양산된다면  우리  안에서  진정한  기도는  죽을  것입니다.


                   위의  두  가지  사실만을  가지고서도  ‘기도의  분량’이라는  개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만,  이에  관련한  중요한  본문인  마태복음  6장  7절
               말씀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관하여도  살펴보도록  합시다.


                   마태복음  6장의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해석이  되어  온  말입니다.  사실  수없이  많은  견해들이  있지만,  중언부언의

               정확한  뜻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중언부언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계십니까?


                   사실  “중언부언”(헬라어로 밧톨로게오)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이곳에  단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뜻은  이  말의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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