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6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_ 101가지 성경 이야기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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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멸망으로 가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저주를 말합니까? 히키의 예처럼, 그의
자손들은 저절로, 자동적으로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는 그런 내용이 되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우리 역시 아담의 후손들이지만, 우리는 도리어 큰 복
가운데 있습니다. 왜입니까? 아무 때에든지,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한다면 그 언약의
저주로부터 탈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은 그 사람이
‘여전한 언약적 저주를 선택하느냐’, ‘언약적 저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즉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느냐, 아들이 신 포도를 먹느냐’에 달린
것이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는다고 해서 아들이 이가 시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받을 때, 무조건적으로 임하는 불가항력적인 어떤
힘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삼사 대에 이르는 저주’가 선언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거저 임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천 대까지 이르는 복’
가운데 있다고 해서, 내가 잘 믿지 않아도 거저 은혜를 받을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언약의 복과 저주를 선언하시고 시행하시는 것이 맞지만,
항상 그것은 대상자인 그 사람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언약적
저주하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더 이상 저주는 그에게
효력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언약적 복, 즉 부모와 조부모가 수대에 걸쳐 믿어 온
가정에서 자랐다고 할지라도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더 이상
복은 그에게 효력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언약의 이러한 특성에 무지함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공포심만을 조장하는 무속적 저주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 언약의 복과 저주를 읽을 때, 언약의 당사자인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고, 그 위치에서 하나님 앞에 최대한
신실하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적 삶’입니다.
4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