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3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_ 101가지 성경 이야기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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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적인  능력을  완전하게  신뢰하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  완전하게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고의로  아주  늙어  아이를  가질  수

               없을  때에  부르셨습니다.  인간적  의존을  꺾기  위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도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행로에서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통해,  집에서  길리운  종

               엘리에셀을  통해,  첩에  의해  얻은  자녀인  이스마엘을  통해  이  나라를  이루어  보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태어나게  하신  사건이  “죽은  태를  여신”(롬  4:19)사건임을
               경험한  아브라함은  변화합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를  로마서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이삭을  죽여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미  보여  주셨던  하나님의  능력”  곧,

               사람의  능력을  완전히  끊는  방법으로써의  이삭의  탄생을  경험한  아브라함은  다시
               다가온  이  언약과  명령의  충돌을  부활
                   신앙으로  이겨  냅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는  일련의  사건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를  하나님께  바치러  모리아  산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일  결심을  하고  가긴  했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다시  살려
               주실  것이라  믿고  그  산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즉  그는  아들과  함께  내려올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환들에게  “우리가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돌아오겠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것을  드린  아브라함”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상식과  언약이  충돌할  때,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확장해서  말하자면  이  본문은  우리에게  “부활  신앙이란  사망을

               극복하는  것”  즉, “인간의  모든  상황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이  본문은  더  나아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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