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 - 구원이란 무엇인가-김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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됩니다. 그러니까 믿음 자체가 선물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 더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가 알기도 전에 내 안에 역사하셔서 나
로 하여금 복음 들을 기회를 주실 뿐 아니라 그 복음을 깨닫을 수 있도록 내 속에 미리 역사
하셨다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려는 의지가 있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
나님의 그 구원 의지가 역사하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이요, 신실하신 분이요, 창조주 하나님은 태초의 계획을 당신 뜻대
로 진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모월 모시에 나로 하여금 복음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은
태초부터 나를 구원하시려는 의지가 있었구나, 그렇게 결정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때가
차매 성령의 미리 역사하시는 은혜로 나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고 자기를 주장하는 나의 강
퍅한 의지를 깨뜨리셔 복음을 믿게 하고 구원을 받도록 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예정의 교리를 깨닫는 것은 믿음의 현재에서 되돌아볼 때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깨닫
게 되는 이 예정 교리를 태초의 시점부터 시작하여 생각하면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태초에
서 시작하면 내가 믿음이 있다고 하나 직접 예정받아서 구원받았는지 도깨비에 홀려 믿음이
있다고 하는지, 부흥회에 갔더니 부흥사가 윽박질러 내가 믿음이 있다고 했는지 알 수가 없어
늘 불안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성경은 그
렇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현재에서 시작합니다.
예정의 교리는 믿음의 미래를 가르치려는 가르침
신약 성경 요한복음에 예정의 교리가 잘 나타나 있는데, 예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항상 두 가지로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
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구원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멸망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가끔 제가 예화로 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미술 전람회가 열렸는데, 피카소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후루시초프가 그 그림을 보고, “당나귀가 꼬리를 흔들어서 그린 그림”
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그때 그 그림이 그런 평가
를 받은 것입니까? 이 사실은 피카소의 그림이 그런 평가밖에 받을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후루시초프가 그림 볼 줄 모른다는 것, 즉 자신의 무식을 폭로한 것이 아닙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신
(神)에 눈이 가려져 예수가 진리가 아니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 심판을 받았
습니까? 사실은 예수님을 심판한 자들이 진리에 속하지 않는 자임을 스스로 드러낸 것입니다.
빛과 생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빛과 진리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어두움과 거짓에 속한 자임을 스스로 명백하게 증명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정의 교리는 태초의 시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생각하는 교리가 아니라, 오늘 복음
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믿음의 현재에 의해 이해되어야 하는 교리입니다. 내가 복음을 믿
음의 눈으로 받아들이면 빛에 속했습니다. 반면 그렇지 않으면 구원에 속하지 아니한 것입니
다.
예정의 교리는 교리 차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하여 존재
하는 교리는 더욱 아닙니다. 바울이나 요한 같은 사도들이 이 예정 교리를 깨달아 열심히 가
르친 것은 결코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