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 - 부산대첩 소식지(창간호 vo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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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대첩이야기 - 부산포 승첩
해, 창원 등지의 왜적은 대부분 이순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 명령을 기다리던 조선 수군은 우부장 정운(녹도 만호)과 거
고 수일 전에 달아나 버렸고, 그 외 지역의 왜적은 모두 부산 북선 돌격장 이언량을 선두로, 전부장 이순신(방답 첨사), 중
기지 쪽으로 모여든 것을 확인했다. 위장 권준(순천부사), 좌부장 신호(낙안군수)가 장사진을 지
어 깃발을 날리고 북을 치면서 기세당당하게 왜적선의 소굴
그 날은 가덕도의 천성 서쪽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로 돌격해 들어갔다.
이튿날인 29일, 새벽에 배를 띄워 양산강과 김해강(모두 낙
왜적은 대선 4척으로 선봉 함대를 조직해 조총을 집중 발사
동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하류)앞에 이르러 보니 왜적 30여
명이 큰 배 4척, 작은 배 2척에 나눠 타고 양산에서 나오고 하며 저항했다. 그러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 수군은 이를
있었다. 그들은 조선 함대를 보고는 배를 버리고 뭍으로 도 무시한 채 포격을 가하며 돌진했다. 왜군의 조총 공격쯤은
망갔고, 경상우수군이 왜적의 뒤를 쫓아가 적선을 모두 불태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선봉으로 나왔던 왜적 대선 4
척은 연합함대의 집중 포화와 거북선의 당파를 당해내지 못
웠다.
하고 순식간에 깨졌고, 배에 탔던 적병들은 헤엄쳐 뭍으로
연합함대는 두 편으로 나뉘어 양산, 김해 두 강을 거슬러 올 도망가기 바빴다. 기세가 오른 조선 수군은 정운을 선봉으로
라가서 적을 탐색했다. 부산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배후를 해 장사진을 유지하며 부산포에 정박해 있던 적선 500여 척
정리해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날이 어두워지고 탐 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색 작업을 끝내자 가덕도 북쪽 바다 동매산 아래로 돌아와
거기서 밤을 지냈다. 이곳에서 이순신, 이억기, 원균, 정걸 4 그러자 적들은 연합함대의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감히
명의 장군은 밤늦게까지 내일에 쓸 전략을 토의했다. 바다로 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총을 들고 모두 산 위로 올라
가 여섯 군데에 나누어 진을 치고는 아래쪽을 향해 조총을
다음 날인 9월1일(양력10월5일) 새벽, 가덕도 북쪽을 출발한 쏘아대는 데, 마치 우박이 퍼붓듯 했다. 그 중에는 조선의 무
연합함대는 부산 앞바다를 향해 전진했다. 여수를 떠나 수 기인 지자. 현자총통 등이 역동원 되기도 했는데, 이는 왜적
백리 바닷길을 노 저어온 지 7일 만에야 목적지에 접근할 수 이 우리의 총통 무기들을 빼앗아 조선 백성들로 하여금 쏘
있었다. 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더욱더 분개한 조선의 장수
연합함대는 몰운대를 지나 화준구미(사하구 몰운산 화손대 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해 들어가 천자. 지자총통, 장군
전,피령전, 장편전, 탄환 등을 한꺼번에 쏘아대며 해가 질 때
부근)에 이르러 왜적선 큰 배 5척, 다대포에서 큰 배 8척, 서
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평포에서는 큰 배 9척, 또 절영도 앞에서 큰 배 2척 등 모두
합해서 24척을 만나는 대로 깨뜨려 불태우면서 승승장구하 전투는 해가 져서야 끝이 났다. 결과는 조선 수군의 일방적
며 부산 앞바다로 나아갔다. 인 승리였다. 비록 벤 적의 머리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조선
함대는 왜적선을 무려 100여 척이나 깨뜨리는 대전과를 거
절영도 안팎을 샅샅이 수색한 이순신은 쾌속정 하나를 부
두었다.
산 앞바다로 보내 적정을 탐색하게 했다. 오후 3시경 돌아온
쾌속정으로부터 ‘적선 대략 500여 척이 부산 선창에서 동쪽 이순신은 이 부산포해전을 통해 부산에 있던 적선 전부를
산기슭 아래까지 벌려있고, 선봉선 4척이 초량목(영도다리 격파하지는 못했다. 그가 애초에 의도한 수륙연합 작전이 이
있는 곳)까지 마주 나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의 연락, 보급기지로 이
용되던 소굴을 공격해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함으로써 적
이순신은 긴급히 지휘관 회의를 소집해 공격 시기를 논의했
이 전의를 잃게 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것은 이순신 스스로
다. 원균과 정걸은 다음 날 공격을 개시하자고 주장하는 반
면, 정운은 내일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순신 부산해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장계를 올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은 정운의 뜻과 같았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이순신은 “만일 우리 군사가 전후 네 차례, 열 번의 접전에서 번번이 승첩을 거두었으나
지금의 승승장구하는 위세로써 공격하지 않고 물러나면 반 장수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싸움보다 더 큰 것이 없
드시 왜적에게 우리를 멸시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하고 즉 었습니다. 전에는 적선의 수효가 많아 봤자 70여 척을 넘지
시 공격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나팔수에게 나팔을 불 못했사온데 이번에는 적의 소굴에 470여 척이 늘어선 가운
어 전 장병의 시선을 모은 뒤, 이순신은 마침내 공격을 명령 데로 위풍당당하게 뚫고 들어가 하루 종일 공격해 적선 100
하는 독전기를 기함 위로 높이 올렸다. 여 척을 격파했습니다. 그래서 적들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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