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 - 부산대첩 소식지(창간호 vol.1)
P. 13
● 부산대첩이야기 - 부산포 승첩
몰운대에 소재한 정운공 순의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20호)
해지고 목을 움츠리며 두려워서 벌벌 떨게 했습니다. 비록 적어 보고했다. 그 밖에 전사자들은 예를 갖춰 장사 지내준
적의 머리는 베지 못했을지라도 힘써 싸운 공로는 지난번 보 일, 부상자들에게는 약을 주어 치료하고 사상자 가족들은
다 훨씬 더 컸습니다. 법대로 구휼한 일, 전리품의 내역과 배분 사실을 상세히 적
어 보고한 일 들은 다른 승첩보고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전투에서 이순신도 크나큰 손실
을 보았다. 바로 녹도만호 정운 장군이 그날 전투가 막바 본영으로 돌아와서도 이순신은 정운 장군을 잃은 것이 생각
지에 이르렀을 무렵 아깝게도 적의 철환에 맞아 전사한 것 할수록 분하고 애석했다. 수많은 장수들 중에서도 정운은 이
이다. 순신이 서로 같이 죽기를 기약하고 모든 일을 의논해온 장수
였다.
정운은 남다른 정열과 의기를 가진 장수였다. 그는 네 차례
전투와 열 번의 접전 때마다 번번이 선봉에 서서 큰 공을 세 그는 정운 장군의 장례를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예를 다해
웠으나 끝내는 적진 속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치렀다. 여러 장수들 중에서 별도로 차사원을 정하여 각별히
호상토록 했고, 임금에게는 정운을 이대원 사당에 같이 모시
이순신이 정운 장군을 잃고 애통한 마음으로 가덕도에 도착
기를 주청하는 장계를 올려 선조의 허락도 받아냈다.
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거기서 돛을 내리고 잠깐이나
또한 친히 정운을 제사하는 글을 지어 그 영령을 위로했다.
마 군사들을 잠재운 뒤 이튿날(초 2일) 아침 진을 파하고 다
시 여수 본영으로 돌아왔다. 조선 수군의 승첩이 연이어 있던 몇 달 동안 육지에서는 남
북 도처에서 승전 혹은 패전이 엎치락뒤치락 했다. 그 와중
본영에 돌아온 이순신은 9월17일, 지난 제3차에 걸친 승첩
에 육지의 왜적은 이순신 함대와 의병들에 의해 서해와 육상
때와 다름없이 ‘제4차 부산포 승첩을 아룁니다.’란 제목으로
으로 통하는 보급로들이 원천 봉쇄되는 바람에 몇 달이 지
임금에게 승첩 장계를 올렸다.
나도록 군량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하자 굶주림을 면하기 위
이 장계에서도 그는 장수에서 종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고하 해 차차 부산 쪽으로 몰려 내려왔다. <하략>
를 가리지 않고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이면 그 공을 세세히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