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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은 흉조(凶鳥)는 간 데가 없고 27
까악까악 까옥 소린 사라졌건만 문화
들고 날고 이십 년에 설음만 느니 · 예술
나 뛰어놀던 날 옛날이
더욱 그립다. · 체육
-「까마귀 날던 때」 전문- / 교육
그의 글 중에서 꼭 여기 소개하고 싶은 것이 있다. 추모비문(追慕碑文)이다. 이 추모비문은 전 재산 / 종교
을 바쳐 지역사회 발전을 위하여 헌신 봉사하시다 돌아가신 윤학영(尹學榮)씨를 추모하는 비문이다.
수원서 병점을 거쳐 오산을 가자면 죽미고개를 넘어야 한다. 철도로 가자면 긴 터널을 통과해야 하지
만 신작로 길로 가자면 병점에서 오산 사이가 거의 고갯길이다. 이 중턱에 유엔군초전기념비가 있다.
유엔군이 참전하여 처음 싸운 곳이기도 하고 또 전몰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 죽미고개 동쪽 산들
은 오늘도 소나무 숲과 잡목 숲이 우거졌고 일제강점기 때에도 울창했던 고장이다.
외삼미동(外三美洞), 이곳 나무는 반세기 전 고 윤학영 씨의 조림사업으로 이룩된 삼림지대다. 광
무 2년 음력 정월 12일에 여기 조용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12세 때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한
문을 독숙하고 선대유업을 선계선수하였다. 가난한 농가 살림을 타개하기 위한 그의 지론은 한해 살
림을 꾸려가기 위해 한 해 농사를 잘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우리나라 초유의 행
사인 획기적 사업으로 자작농제를 창설하였다. 토지개량사업, 저수지 구축의 일을 동민의 사업으로
전개해 나갔다. 동민의 빈곤이 구수(驅遂)되자 단결심은 굳어져 힘이 되었다. 동민의 단결된 힘을 선
수(善守)하기에 조림사업을 전개하였다. 동리의 10년, 20년 앞날의 부를 이루는 길은 산에 나무를 가
꾸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한 그루 한 그루 착실히 나무를 심었다. 20년이 되자 온 동리가 삼림
속에 묻히게 되었다. 당시는 푸른 숲속에 파묻힌 평화경이었다. 집집마다 양계를 하여 꼬꼬댁거리는
닭 소리는 한가로운 농가의 평화와 행복의 상징이었다. 밭은 기름져 흙이 검었고 논에는 물이 언제나
출렁거렸다. 모범농촌이라 하여 먼 곳까지 칭송이 자자하였다. 천성이 인후하고 도략(圖略)이 흥대한
그는 약관에 이미 국가와 민족의 백 년 앞을 내다보고 벽촌 아동 교육에 뜻을 세워 사재로 삼미의숙
(三美義孰)을 설립하였다. 오산화성궐리사 유지에 헌신 노력하여 춘추제향을 받들 방책을 수립하고
사도(斯道)발전을 위해 진력하였다. 오산중·고등학교가 설립되자 학교 재정을 염려한 그는 경향으
로 다니며 노력한 나머지 안정을 이루게 한 공이 컸다.
오호라, 천명을 다함인가, 임께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더니 애석하게도 승천하시다 니 오매간 잊지
못할 부민(富民)의 흥국지기(興國之基)의 길 닦던 염(念)을 어이하시나, 살아서는 세상에 끼침이 있고
죽어서는 후세에 남김이 있는 생애를 마친 분, 그의 발자취는 길이 남았다. 남을 위하고 동리를 위해
일한 발자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