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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떡시루를 바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가수동 이규란 어른 댁의 경우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고 판
단한다. 가수동의 경우 필자가 현장을 답사한바 흐르는 개천의 물이 한 곳에 웅덩이의 형태를 보이는
곳이 치성을 드리는 장소였다. 그러므로 제보자의 진술과 같이 웅덩이에 시루를 바쳤던 것은 풍년에
대한 기원이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그렇게 웅덩이에 바쳤던 시루는 다시 가지고 와서 다 식었
는데도 그것을 꼭 집안 식구들이 함께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홰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왜 위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이 역시 제보자의 집에서만
위하던 나무였다. 이 나무가 마을의 서낭이라 모셨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홰나무는 영
험함이 입증되기도 하였단다. 어떤 사람이 홰나무 가지를 꺾어서 깔고 앉으면 치질이 낫는다고 하여
그걸 꺾어 갈려고 하다가 크게 혼이 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 마을에서 서낭으로 모시는 나무
의 가지를 꺾거나 나무를 베면 목숨을 잃는다는 식의 위엄은 아니지만 크게 다쳤다는 말이 아닐까 한
다. 그래서 그 뒤로는 어떤 사람도 이 나무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령스러
움 때문인지 얼마 전 마을로 들어온 무당이 이 홰나무에 치성을 드리고 있다고도 한다.
제보자 : 이규란(여, 71세)
2) 금암동
제보자의 댁에서도 굿은 하였다고 한다. “굿하면 으레 하잖아요?”라는 말씀 속에 우리 조상들께서
무속에의 의존이 얼마나 강하고 절실하였는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굿을 하고 나면 성줏대도 새로
모셨다. 그리고 집에는 터줏가리와 업가리도 함께 모셨다. 그러나 왜 터주나 성주를 모셨는지에 대하
여는 기억이 없고 다만 제보자의 어머님 생전에 하던 의례적인 신앙행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제석이나 조상 등등은 모신 기억이 없으시다.
제보자 : 전응식(남, 77세)
3) 누읍동
제보자의 댁에서는 터주, 성주, 대감, 제석 등의 신앙이 있었다. 터줏가리 속에 모신 터주항아리에
는 쌀을 넣어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감독에도 쌀을 모셔두었다고 하였다. 성줏대도 있었는데 종이
로 엮어서 걸어 놓았던 것으로 기억하였다. 제석주머니도 모시고 있었다고 하는데 제석주머니를 ‘칠
석주머니’라 하였다.
터주항아리에 쌀을 넣었다는 진술을 제보자께만 들은 것은 아니지만 ‘볍씨’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시 물어 그것이 쌀이었는지, 볍씨였는지를 확인했어야 하는데 조사에서 이를 이행하지
오산시사
못한 탓이다. 일반적으로 볍씨를 담아 두는 것은 보관상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라 필자는 판단하고 있
다.
제
6 한편 제석주머니를 칠석주머니라 한 이유에 대하여도 확인이 필요했으나 역시 확인하지는 못하였
권
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제석주머니의 쌀을 칠석날 꺼내어 밥을 해먹고 하니 제석주머니는 곧 칠석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제석주머니를 칠석주머니라 한 것이라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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