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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세교동(큰말 : 홍촌말) 173
세교동 큰말인 홍촌말에서도 성주, 제석, 대감, 터주 등을 모셨다고 한다. 터주는 뒤란에 모셨으며 구비전승
안방 문 뒤에는 대감독을 놓았다. 방아를 찧고 나서 제일 먼저 대감독에 쌀을 채웠다고 한다.
대들보에는 성줏대를 걸어놓았으며 제석은 방안에 고깔을 씌우고 두 개를 모셨다고 한다. 제석주 · 민속
머니를 두 개 모시는 경우에 하나는 제석이고 하나는 조상인 경우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그러한 내용 · 경기도당굿과
까지는 조사되지 못하였다.
마을회관에서 제보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 충청도에서 시집을 오셨다는 아주머니께서는 충청
도에는 대감항아리가 없었다고 한다.
경기재인청
시월에 고사를 지내면 먼저 대청에 갖다 놓고 절을 하였다. 이때는 단골이 와서 장독대고 우물이고
떡을 해서 놓고 빌어주었다고 한다. / 성씨
10) 세교동(건너말) · 인물
제보자의 댁에도 성주와 터주, 대감을 모셨다. 그러나 그것도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성주는 대들
보에 있었으며 터주는 장광(장독대) 옆에 있었다. 그리고 대감항아리는 있었는데 한국전쟁 당시에 없
어졌다고 한다.
11) 세교동(오리골)
오리골의 주제보자이신 윤옥(95세)할머니는 철원에서 피난 오신 어른이다. 그런 까닭으로 오산의
자료와 철원의 자료를 함께 조사할 수 있었다.
오산으로 피난 오셔서는 시어머니 생전까지만 단골이 있었다. 할머니가 집안의 어른으로 생활하실
때에는 굿을 하지 않았다. 철원에서는 단골이 굿을 하러 오면 남자와 여자가 다 들어온다. 무당들은
신이 내린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굿을 하고 나면 철원에서나 오리골에서 모두 성줏대를 걸었
다. 할머니에 의하면 이러한 풍속은 철원과 오산이 같았다고 한다. 오산에서 굿을 하면 여자하고 남
자 이렇게 두 사람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에서 온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지금도 대감항아리는 모시고 있다. 칠성주머니는 없어졌지만 예전에 못 살 때에는 칠성주머니(제
석주머니)의 쌀을 내어 쌀밥을 해 먹었다고 한다. 칠성주머니가 없어진 이유에 대하여 “시방은 잘 먹
고, 잘 사니까 이게 자연적으로 없어진 거유.”라고 하신다. 이로 보아 제석주머니가 사라진 이유 가운
데 하나가 확인된다고 여긴다. 제석주머니는 일종에 비상식량의 역할도 담당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는 여러 곳에서 확인된 바 있다. 한편 칠석에 칠성주머니의 쌀을 내어 밥을 하고 미역
국도 끓이고, 밀떡이라 불린 부침도 부치고 하였다. 그렇게 마련된 음식은 먼저 삼신할머니인 제석주
머니에 갖다 놓고 고사를 드린 뒤에 먹었다.
가을에는 가을떡을 하였는데 그 떡은 주방(조왕)에도 놓고, 장독간에도 놓고 이 곳 저 곳을 다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