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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는 터주, 업, 대감, 조왕의 순으로 떡을 올린다. 또한 광을 비롯하여 집안의 구석구석 떡을
올렸다.
터주에는 터주항아리를 두고 벼를 담아두었고, 대감항아리에는 쌀을 부었다.
6) 벌음동
오산에서 이 마을에 천주교가 처음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많은 부분의 민속이 사라졌
다고 한다. 그러나 천주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터줏가리는 있었다.
터줏가리에는 가을고사를 지내면서 떡을 올리고 음식도 함께 차려서 올렸다. 그리고 제석주머니도
모시고 있었는데 이도 한 60여 년 전에 없어졌다. 그 당시는 제석주머니에 쌀을 넣어두었다.
7) 서동(서녘말)
서녘마을에서는 성주, 터주, 업, 제석, 대감의 신격을 모셨다. 터줏가리는 거의 집집마다 없는 집이
없었다고 한다. 터줏가리는 매년 새로 이엉을 만들어 터주항아리가 비를 맞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가을 떡을 하면 터주 앞에 놓았다. 그리고 업도 짚주저리를 만들어 모셨는데 터주보다는 크게 만들었
다.
또 성주신도 모셨는데 성주를 조상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제석주머니는 삼신할머니를 모시는 의
미였다고 한다. 그리고 대감도 모셨는데 대감은 굿을 할 때 무당이 주어 섬기는 대감신격으로 기억하
였다.
8) 서랑동
서랑동 김진대 어른댁에서는 성주와 제석, 터주, 대감, 조왕 등의 신격을 모셨다. 그런데 큰댁에서
는 터줏가리가 세 개였다고 한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하나는 터주고 하나는 업일 것이라 여긴다. 그
리고 하나는 산신일 수도 있고 대감일 수도 있다. 이는 화성시 정남면 괘랑리나 보통리 지역에서 조
사된 사례로 짚주저리를 세 개씩 모시는 집들이 있었는데 가정의 내력에 따라 모시는 것으로 매우 특
별한 의미가 있었던 가정신앙의 형태였다. 그런데 김진대 어른의 큰댁에 터주를 셋 모셨다고 하니 아
마도 이러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판단하는 것이다.
오산시사
그런데 한편으로는 터줏가리의 형태가 아니라 시루를 셋 올렸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고 추측된다.
제보의 내용을 정리하여 보면 “조왕과 대청, 터주 이렇게 세 개를 반드시 한다.”고 하는 까닭이다.
제 그리고 대감독의 크기도 집안마다 제각각인 것이 사실인데 이 댁의 대감독은 쌀이 세 가마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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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는 큰 것이었다고 한다. “항아리가 어떻게 큰지 몸 하나 엎어놓고 까꾸로 들여다보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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