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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갈곶동(가룻)
칠석에는 제석주머니의 쌀을 꺼내서 밥을 지어 먹는다. 그리고 밀떡을 부쳐서 먹었다. 여기서 밀떡
이란 부침개를 말하는 것이다.
4) 궐3동(대호밭)
대호밭 김호수 어른댁에서는 제석을 모셨었다고 한다. 제석주머니에는 쌀을 넣어두었는데 안방의
아랫목 위에 못을 박고 나무 두 개를 걸고 창호지를 덮었다. 그 모양이 고깔과 같았다. 여름철에 먹을
것이 변변치 않으니까 무슨 보양식 모양 그렇게 두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신다.
5. 단골
단골은 우리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다. 자주 다니는 식당은 단골식당이다. 자주 오는 손님은
단골손님이다. 이렇듯 단골이라는 말은 자주 보는 친밀한 사람이나 장소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단골이란 무속에서 유래를 두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인 듯하다. 필자 역시 그러할 개연
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오산지역을 조사하면서 “단골이 누구였는가? 단골이 어디에서 왔는가?” 등으
로 질문을 하면 십중팔구 단골무당을 이야기한다. “우리집 단골은 어디에 사는 누구였다.”로 대답한
다.
오산시의 가가호호를 다니면서 단골이 되었던 무당은 그 수가 매우 많다. 지역마다 다르고 집안마
다 다르다. 형제간이라도 단골무당은 다를 수가 있다. 그런데 오산시의 단골과 단골들이 담당하였던
단골판은 여느 지역에 비해 매우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경기재인청(京畿才人廳)’의
본거지가 오산시이며 오산시 부산동 가마뫼이기 때문이다. 경기도대방의 집안이 바로 가마뫼에 있었
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의 인물로 경기도 도당굿의 판을 좌지우지하였던 이용우가 바로 이 지역출
신이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이용우 일가에 대한 이야기를 채록할 수 있었다. 이용우의 본명은 이남북이었다는
사실과 가마뫼에 교방(敎坊)에 해당하는 교육이 펼쳐졌다는 사실 등이었다. 그러나 이용우 일가가 오
오산시사 산시 단골판을 장악하였던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아마도 마을단위의 굿인 도당굿(都堂굿)
에서는 세습무 집단인 화랭이 일가의 영향력이 컸겠으나 일반 개인집의 치성이나 재수굿 등에는 세
(勢)를 장악하고 확장하기가 어려웠던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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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도 크고 경비도 많이 들기때문에 일반 가정의 굿판에 세워지기는 어려웠던 현실적 한계 때문이 아니
었을까 추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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