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0 - 제6권
P. 190

11) 서동(서녘말)

                    이 마을의 단골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집안의 아주머니였는데 수원에서 살다가 들어와 자연스럽
                  게 단골이 되었다고 한다. 동네사람들이 빌어달라고 하면 해주고 하면서 농사도 짓고 살았다. 수원에

                  서도 굿을 하기는 하였으나 전문적으로 하는 분이 아니라 누가 원하면 해주고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에 이 마을로 들어와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아주 큰 굿은 아니지만 비교적 재수

                  굿과 같은 굿도 혼자서 하셨다고 한다.
                    이 단골은 처음 시집을 가서 아이도 셋을 낳았는데 신이 내렸다고 집안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그러

                  다가 이 동네 유 씨 어른을 만나 재가한 것이며 이로써 이 마을로 들어와 사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12) 서랑동
                    서랑동에 들어오던 단골은 둘이었다. 제보자댁 김 씨네는 수원비행장 밑 황계동 즘말에서 왔다. 아

                  주 얌전하시던 분이었다고 하며 선비 같은 분이었다고 한다. 그 남편은 피리와 퉁소를 잘 불어 방송
                  국에 가서도 연주를 하였으며 이 밖에도 가야금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악기를 잘 다루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이 내려 솟은 사람이 아니라 대를 이은 분이었다.
                    “그 시어머니가 대내림을 하는 거야. 며느리가 와도 다 저기야.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사람들 조직상

                  태가 뭐냐면 그 시어머니가 오산 이런데 단골들을 얼마를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이걸 천상 며느리가
                  인수하려면 대내림을 반드시 해야 하거든, 그래 생전에도 그렇고 자기네 의무사항으로도 그렇고 어

                  쩔 수 없는 상황이 되더라고. 그 만신사회에는 그게 있더라고.”라 하는 말의 정황을 보면 황계동 즘말
                  에 살았다는 단골은 화랭이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차씨네는 오산에서 들어왔다. 별호를 깜댕이 무당이라고 하였으며 이북에서 피난을 나온
                  사람이었다. 깜댕이 무당은 추장골로 새장터의 우시장 가까이에 살았다.





                  13) 세교동(큰말 : 홍촌말)

                    제보자의 댁에는 단골무당이 발안에서 왔던 것으로 기억하였다. 그러다가 마을에 무당이 생긴 뒤

                  로는 마을의 무당을 단골로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시자 그 따님이 이어받았으며 그렇
                  게 삼대가 이어서 했다고 한다. 유 씨네였던 것으로 기억하였다. 그러나 남자들이 악기를 다루거나
                  뒷바라지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가계세습무의 집안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일반적 가계세습
      오산시사
                  무인 화랭이 집단은 아니었던 것이다.


      제

      6
      권           14) 세교2동(건너말)

                    제보자댁의 단골은 일정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대개의 경우 마을의 아주머니들이 누가 잘한다
    188           고 하면 그 사람을 부르곤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단골이라고 하여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185   186   187   188   189   190   191   192   193   194   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