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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서낭은 나무를 모셨던 것은 아니고 돌을 쌓아두고 그 돌무더기를 서낭으로 모셨었다. 199
구비전승
6) 금암동(우물고사) · 민속
집안에 개인 우물이 있었다. 우물만을 위하여 따로 고사를 지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을에 즉 시
월상달에 고사를 지내면 우물에 떡을 올렸다. 또 무당이 와서 굿을 하고 나서도 우물에 떡을 올렸다. · 경기도당굿과
7) 누읍동(가을고사. 서낭고사) 경기재인청
시월상달에 가을고사를 지냈다. 떡은 팥시루로 하였다. 떡을 하면 제일 먼저 대청에 둔다. 그리고
터주로 가져가서 터주에 올렸다. / 성씨
대청에다 제일 먼저 떡을 올리는 것은 “제일 어른이 가 봐요. 어른들이 그러시더라고.”라는 말씀으
로 보아 성주가 집안의 최고 신격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시루를 부엌에는 올리지 않는 이유를 부엌에 · 인물
서 시루를 떼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냥 떡만 조금 떼어 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독대
에도 시루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떡을 조금 떼어 두는 정도였다. 그러나 장항아리 위에 떡을 떼어 놓
는 이유를 “장맛을 달게 해달라고 거기다 놓더라고요.”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달다는 것은 ‘입맛이 당
기도록 맛이 있다.’는 뜻이다.
누읍동의 서낭은 당산에 있었다고 한다. 나무의 종류에 대하여는 기억이 없으나 동네를 잘되게 해
달라는 서낭이라고 한다. 각 가정마다 서낭에 치성을 드렸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앞서 업을 모시던 집
에서 가장 치성을 드렸던 것으로 기억하였다. 그 부잣집에서는 별도로 시루를 해다 놓고 빌곤 하였다
는 것이다.
8. 기타
복조리 가수동 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