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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부지역에서 연행된 대부분의 경기도당굿은 비슷한 절차에 따라 굿을 진행했다고 한다. 인                                          245
                  천 동막도당굿과 부천 장말도당굿도 순서와 내용에서 동일하게 진행되었는데 동막도당굿 등 대부분                                             구비전승

                  지역에서는 도당모시기를 할 때 나뭇가지에 도당신을 실어 모셔왔는데 부천 장말도당굿에서는 도당
                  할아버지라는 살아있는 인격적 존재가 이를 대신했다. 이 부분은 부천 장말도당굿만의 특징이라 할                                            · 민속

                  수 있다. 이와 같이 같은 경기 남부권이라도 예산 등 마을의 사정과 연행하는 무당에 따라 굿의 절차                                         · 경기도당굿과
                  및 크기에 차이가 있었다 한다.





                                                                                                                    경기재인청

                  4. 경기도당굿 화랭이

                    경기도당굿은 세습무 집안의 남무인 화랭이가 중심이 되고 여무인 ‘미지’가 함께 굿을 진행해 나간                                          /  성씨

                  다. 경기도당굿을 이끌어나가는 화랭이들은 어릴 때부터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던 무업을 계승                                            · 인물

                  하는 한편 무가·기예·재담 등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 화랭이의 유래를 6세기 신라의 화
                  랑(花郞)제도에서 찾기도 한다. 우리나라 고유의 청년조직인 신라의 화랑제도는 종교적·정치적·
                  군사적·예술적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는데, 고려시대에 와서 정치적·군사적 기능이 사라지고 종

                  교적·예술적 요소만 남은 화랭이로 이어졌다. 고려 중기 이인로(李仁老)는 잡록집 『파한집』에 “계림

                  의 옛 풍속에 남자 가운데 아름다운 외모를 갖춘 자를 가려 구슬장식과 푸른 옷으로 꾸며서 ‘화랑’이
                  라고 이름하였으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를 받들어 그 무리가 3천여 명에 이르렀다. 우리 태조께서
                  옛 나라의 유풍이라고 여기고 숭상하며 바꾸지 않았다. 겨울철에 성대하게 팔관회를 열고 좋은 집안

                  의 자제 네 명을 뽑아서 무지갯빛 옷을 입힌 후 뜰에 나열하여 춤추게 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화랑이

                  없었던 고려시대에 신라 화랑 중 가장 많은 문도(門徒)를 거느렸던 영랑(永郎)·술랑(述郎)·남랑(南
                  郎)·안상(安詳) 등의 사선(四仙)을 빗대어 양가(良家)의 자제를 뽑아 이들을 선랑(仙郎)이라 부르고,
                  그 선랑을 중심으로 악대를 구성하여 팔관회에서 신라의 유풍(遺風)을 본떠 백희가무를 연출하게 했

                  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시대의 화랑이 고려시대의 선랑으로 이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치 및 종교 등 사회적 기반으로 유교가 번성했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고유
                  신앙으로 무속이 성행하고 있었고 이러한 흐름 속에 신라 화랑의 모습이 고려시대 선랑을 거쳐 화랭
                  이로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화랭이에 대한 인식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신분제도의 계급사회인 조선시

                  대에서 최하계층인 화랭이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을 수도 있지만, 왕조실록 등 역
                  사 기록을 보면 유교사회의 규범에 배치되는 내용으로 화랭이들이 기술된 부분도 적지 않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2년(1471) 사헌부 대사헌이 올린 상소문에 “ … 또 영혼이 보인다고 공창(空唱)

                  하여 놀래어 듣는 이가 있으니, 그 요망하고 허탄함이 또 심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남자가 화랑

                  (花郞)이라 호칭(號稱)하고, 그 무사(誣詐)하는 방법을 쓰면서 사람의 재화(財貨)를 낚아 취함이 거의
                  여무(女巫)와 같되, 꾀하는 방법이 더욱 허깨비 같으며, 기타 이치에 어긋나서 도리를 저버리고 사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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