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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女)를 우롱(愚弄)한다든가 사람으로 하여금 사혹(邪惑)하게 하여 예속(禮俗)을 패훼(敗毁)하는 자
가 또 하나 둘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고 하였고, 성종실록 3년(1472)에는 예조에서 아뢰기를 “ … 신
등이 음란한 풍속을 자세하게 살펴보건대 법으로 엄하게 다스릴 바입니다. 이제 유녀(遊女)라 칭하고
혹은 화랑(花娘)이라 칭하며 음란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이를 금제(禁制)하는 조목을 뒤에 자세히 기
록합니다 … ”라 하여 몸을 파는 유녀와 화랑을 동일시하여 천대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나타난 화랑과 유녀의 관계를 손태도(무형문화재 전문위원)는 정약용
의 『목민심서』 「형전 금폭(禁暴)」의 “화랑(花郞)과 유녀(遊女)란 것을 살피건대, 지금 그러한 명칭은 없
다. 지금 걸사(乞士:머리를 기른 승려)와 사당이 두루 다니며 매간(賣姦)하면 항상 이 법을 적용한다.”
는 내용을 인용, “화랑(花娘)은 유녀라고도 불린 창녀로 대개 사당패 집단의 여사당들이다. 이러한 사
당패는 조선 전기 불교의 탄압으로 사찰계통에서 쫓겨나 성립된 유랑집단이다. 이러한 사당패 집단
과 신라 화랑 혹은 신라 화랑의 후대적 존재들인 경기 이남의 무부인 화랭이와는 다른 집단인 것이
다. 그러므로 원래 몸을 파는 여사당을 뜻하던 화랑(花娘)이 기록상의 잘못으로 화랑(花郞)으로 적은
것을 보고 신라 화랑과 혹은 그 이후의 무부인 화랭이를 이와 관계시키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라
며 경기도당굿의 세습무 ‘화랭이’와 왕조실록에 나타난 부정적 이미지의 ‘화랑’에 대해 직접적인 관계
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경기도당굿이 소멸되어 가는 과정에는 굿을 진행하는 남자 무당인 화랭이의 감소도 주된 요인으
로 볼 수 있다. 세습무 화랭이들이 감소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1894년 갑
오경장의 신분계급 타파로 그동안 신분계급 제도에 갇혀 세습적으로 무업을 하던 화랭이들이 이탈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해방 후 화랭이들의 주 활동무대인 도당굿판이 줄어들고, 사회의 멸시와 천대
로 굿판에 유입되는 화랭이들이 감소한 것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1978년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
광부)에서 조사한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경기도편」에 “시흥시 포리에서는 10여 년 전까지도 화
랭이패들의 도당굿이 있었다. 근처인 군자면에서는 7년 전까지도 도당굿을 했고, 화랭이패들은 7, 8
년 전에 다 없어졌는데 그들은 전에는 그 단골구역이 엄했다고 한다. 그들의 이 근처의 본거지는 옛
날 고을이었던 시흥군 수암면 중하리로 안산 또는 샘말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그밖에도 수원에 제일
많았고 안양·김포 등지에도 있었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경기도당굿이 주 분포지역
인 시흥·김포 지역에서도 1960년대 또는 1970년대 초에 단절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경기도 오산 출신 화랭이 이용우(1889~1987)와 관련한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의 내용은 이 시
기 화랭이들의 현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용우씨는 지금도 10여 곳의 도당굿을 맡아서 하
오산시사 고 다닌다. 이것은 대동(大同)에서 하는 것이라 옛날 그대로이며, 지금 이런 당치성(堂致誠)의 잽이가
가능한 사람은 자기까지 6명 정도밖에 없다고 한다. … 이용우씨에 의하면 경기도에서도 세습무가의
남자를 ‘사니’, 여자를 ‘미지’ 또는 뒤집어서 ‘지미’들로 변(隱語) 쓰는 말은 전라도와 똑같다. … 그는
제
6 10여 년 전에 수년간 수원시 경신회 지부장을 했는데, 화랭이는 다 늙어서 죽어가는 대로 없어지고
권
그 후로도 강신무는 5배는 늘었을 것이라고 했다.”
1978년 당시 동 보고서에서 화랭이의 존재를 조사한 결과, “이상 이번 조사에서 그 존재만을 대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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