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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으로 나누어 조사한 결과 청동기~조선시대에 이르는 유구 252기가 조사되었으며, 716점의 유물이 417
출토되었다. 역사
조선시대의 유구는 집터와 건물지, 움무덤, 목탄가마, 석렬 및 석축, 구상유구, 수혈유구, 나무기둥 / 유적
구멍 등이 확인되었다. 건물지는 1지점에 1동, 5지점에서 4동이 확인되었다. 1-1호 건물지는 구릉 정
상부 평탄지에서 적심과 아궁이 등이 잔존하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구상유구와 석렬이 분포한다. 5 · 유물
지점에서는 구릉 양쪽 사면부에서 4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1호 건물지는 적심과 온돌시
설을 갖춘 초석건물지로 추정된다. 2호 건물지는 적심만 확인되었으며, 4호 건물지는 적심과 구들,
담장으로 추정되는 석렬이 확인되었다. 3호 건물지의 경우 조사단에서는 건물지로 보았지만, 정황상
4호 건물지의 뒤쪽 사면에 토사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축대로 추정된다. 5동의 건물지는 분청자·백
자·기와 등 유물의 속성을 보았을 때 15~1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집터는 총 40기가 조사되었다. 두 가지 유형의 취사·난방시설이 확인되었는데, 한쪽 벽면에 아궁
이를 설치한 것과 집 내부 전면 혹은 일부 구간에 아궁이와 온돌을 설치한 것이다. 구들은 2~5열로
다양한데, 거친 돌을 사용하여 고래열을 조성한 것과 단순히 땅을 파서 위를 덮은 형태가 공존한다.
움무덤은 고려시대 묘와 함께 확인되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조선시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 중 백자·청동숟가락 등 유물이 출토된 유구는 대부분 1지점과 4지점에 분포하는데,
번조상태를 보았을 때 집터나 건물지에서 출토된 백자보다 질이 낮은 것이 대부분이다. 굽의 형태와
번조받침, 시유정도 등의 속성을 보았을 때 15~16세기의 특징을 보이는데, 조선시대 전기 중에서도
늦은 시기에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 목탄을 생산한 가마 2기가 확인되었지만,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시기를 알기 어렵다. 석축
유구와 석렬유구 등은 건물지 혹은 일대 마을과 관련된 시설로 추정된다.
7. 궐리사(闕里祠)
1) 궐리사의 창건
정식 명칭은 ‘오산시 궐리사(烏山市 闕里祠)’로 1994년 4월 20일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로 지정되
었으며, 궐동 147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궐리(闕里)는 노나라(현재의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에 있는 마을로 공자가 살던 곳이며, 궐리사
는 공자를 배향한 사당이다. 우리나라로 유입된 공 씨들이 많이 모여 살던 지역에 가묘(家廟)로 건립
되기 시작하였다. 기록상 논산지역의 노성궐리사(魯城 闕里祠, 옛 지명은 니성(尼城), 충청남도 기념
물 제20호)가 먼저 건립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1687년(숙종 13년) 송시열(宋時烈)이 궐리사를 건립하
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뒤 1716년(숙종 42)에 송시열의 제자들인 권상하(權尙夏)·
김만준(金萬俊)·이건명(李健明)·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등이 노성산 아래 궐리촌(闕里村,
현 위치의 서쪽)에 궐리사를 건립하고 이듬해에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오산의 궐리사는 공서린(孔瑞麟, 1483〜1541)이 정착하였던 마을에 가묘로 세워졌던 것을 179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