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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19)                                                                                      421
                    위와 같이 정조의 명으로 건립된 궐리사는 돈 1,840냥, 쌀 12석의 비용이 들어갔고, 수원유수영에                                      역사

                  서 부담하였다. 그런데도 궐리사 공역에는 국가나 지방에 소속된 석수, 목수 등의 공장(工匠)이 참여                                          /  유적
                  하지 않았고, 완공 후에 별도의 시상을 행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이 공역의 성격이 국가적인 사업으

                  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궐리사는 공 씨 후손들의 주도하여 세워야 한다는 정                                          · 유물
                  조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소요경비만 수원부에서 마련해주고 공역의 실무는

                  공씨가에서 주도하게 함으로써 공역의 상세한 일정이나 참여인원 등에 대해서 특별히 관찬(官撰)기
                  록으로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조의 명에 따라 보고가 이루어졌고, 공역의 시일(時

                  日)을 조정에서 정해주고, 비용을 수원유수부에서 지급하였으며, 각종 제의 절차 등을 정해주었기 때
                  문에 실질적으로는 관에서 설립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 궐리사 제향

                    오산의 궐리사는 니성의 궐리사와 마찬가지로 3월과 9월의 상정일(上丁日)에 제향을 지내기로 하
                      20)
                  였다.  정조는 9월 제향에 앞서 수원 유생의 응제(應製, 임시 과거)에서 ‘성상(聖像)을 본부 궐리사에
                                                    21)
                  봉안하였다’를 부제(賦題)로 출제하였다.  수원에 공자의 후손이 살고 있어 궐리사를 세워 공자의 영
                  정을 봉안하였다는 사실을 유생들에게 확실하게 인지시키기에 충분한 조치였다.

                    그런데 궐리사의 제향은 성균관이나 지방 향교에서 지내는 국가 공식 행사와 똑같은 규모로 할 수
                  는 없었다. 명목상 오산 궐리사는 공씨 후손들이 별도로 세운 사우(祠宇)의 격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향을 위한 사품(祀品, 제사용품)은 어떻게 갖추고, 축문(祝文)은 어떻게 쓸 것인지의 문제
                                                                                    22)
                  등 예법에 맞추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아 여러 차례 논란을 거쳐 확정하게 된다.  먼저 제품에 대해서
                  예조는 『속오례의(續五禮儀)』 「계성사 춘추절향도식」에 변두(籩豆) 각 2개, 보궤(簠簋) 각 1개, 돼지와
                  양 각 1개, 작(爵) 3개에 폐백을 쓰게 되어 있었는데, 이 사례에 따라 제품을 마련하면 검약을 따르는

                  뜻에 합당할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수원부에서는 폐백을 쓰는 것 한 가지만 계성사의 예를 따르고
                  다른 것은 여러 예의를 참고해도 마땅함을 얻지 못할 것을 걱정하였는데, 때문에 니성궐리사에서는

                  폐백을 쓰는 절차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을지 하교를 청하였다. 이에 정조는 제품을 더 줄여서 보궤·
                  변두(簠簋·籩豆) 각 1개, 작 3개로 하고, 폐백 없이 축을 하는데 축과 향은 춘추로 보내 주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궐리사의 제향 의절(儀節)을 공씨 후손들이 주관하는 것으로 결정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공씨(孔氏) 가운데 세거(世居, 한 고장에서 대대로 오래 삶) 중인 존자(尊者) 한 사람

                  이 3작을 모두 올리게 하고, 그중 한 사람은 축을 읽고, 또 몇 사람을 집사(執事)로 삼으라고 하였다.
                  정조는 궐리사의 제향에 향과 축을 대주기는 하되 제의는 공씨들이 주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 것





                  19) 『日省錄』正祖 17年 4月 25日 丁亥.
                  20) 『日省錄』正祖17年 7月 25日 丙辰.
                  21) 『日省錄』正祖17年 8月 2日 壬戌.
                  22) 『日省錄』正祖17年 7月 24日 乙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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