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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6년)에 수원유수부에서 크게 확장하여 규모를 갖춘 것이다. 노성궐리사와 달리 관(官)의 주도
                  로 중건하게 되는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783년(정조 7년) 진사 조득림(趙得林)의 하인 김창기가 공자의 유상(遺像)을 시장 가게에 내다 팔
                  았는데, 마침 시장 거리를 지나던 황경원(黃景源)이 포도대장에게 알려주어 즉시 회수하고 관련자를

                                                   3)
                  추문하였다. 정조는 포교가 향교(香橋) 에 관한 일을 다룬 것은 잘못이라면서 해당 포도대장을 처분
                  하고 구류한 사람은 즉시 풀어주게 하였다. 그리고 유상을 회수하여 니성(尼城)궐리사의 명륜당 동협

                  실에 봉안하게 하였는데, 승지 서정수(徐鼎修)를 시켜 봉심(奉審)한 결과 공자의 영정이 무탈하였다.
                  정조는 대사성 박우원(朴祐源)에게 “선성(先聖)의 유상은 (니성)궐리사에 봉안하는 것이 마땅하고, 봉

                  안할 때 공씨 자손이 배왕(陪往)해야 마땅한데, 재임(齋任) 가운데 한사람을 뽑아 보내고, 배왕하는
                  사이에 열읍에 폐해를 주지 말도록 엄칙하여 보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4)

                    조선 후기에는 공자와 주자의 영당이 전국 각지에서 설립되고 있었다. 따라서 1783년 공자의 유상
                  이 시장에서 거래된 사건은 공자의 유상이 거래를 통해 널리 유포되고 있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니성의 궐리사는 정조의 명으로 공자의 영정을 정식으로 배향하게 되었으므로 그 권
                  위가 한층 격상되었는데, 1년 뒤인 1784년 8월 20일 남부의 유학 공경조(孔景祖)가 니성의 궐리사에

                  수호군을 배치해달라는 상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예조에서는 마땅히 공의에 부쳐야 하나 홀로 상
                  언하였으니 사체가 온당치 않다며 그대로 두게 하였다.                 5)

                    그런데 정조는 1791년까지만 해도 니성의 궐리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니성의 궐리사 또한 일찍이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마땅히 360군현에 모두 공자를 제사하는 장

                  소가 있는데 어찌 유독 니성에 별도의 사우를 교궁(校宮, 향교) 밖에 설립하였는가? 교화가 이르지
                  않고 풍속이 바르지 않아서이다.”라고 하면서 이미 설립된 사우는 어쩔 수 없지만, 차후에 옛 성인의

                  도상(圖像)으로 서원을 세우지 못하게 각 도 관찰사에게 알려주고, 함창(咸昌, 경상북도 상주)에 있는
                                                                     6)
                  주자(朱子)의 도상은 즉시 니성으로 옮겨 봉안하라고 하였다.  즉, 각 군현의 향교에서 석전제향을 올
                  리고 있는데 별도의 사우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이러한 입장은 다음 해 수원부에서 공씨(孔氏) 집성촌이 알려지고, 그곳이 기묘명현

                  (己卯名賢) 공서린이 낙향하여 정착한 곳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뒤 변하게 된다. 정조는 1792년 8월
                  27일 공자탄신일을 앞두고 공자의 후손을 찾아 녹용(錄用, 채용)하겠다는 뜻을 보이고, 대신과 경재

                  (卿宰), 삼사(三司)의 관원들에게 헌의하게 하였다. 그리고 청나라 연경(燕京)에 가는 사행단의 서장
                                                                              7)
                  관을 규장각 각신으로 선발하여 공씨의 족보(族譜)를 구해오게 하였다.  이때 정조는 공서린(孔瑞麟)
      오산시사        의 9대손인 공윤항(孔胤恒)을 녹용하는 것은 물론, 공서린에게 시호를 내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여러




      제           3) 향(香)과 축문(祝文)을 바치려고 특별히 설치한 다리로 문묘를 의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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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           4) 『日省錄』 正祖 7年 8月 16日.
                  5) 『日省錄』 正祖 8年 8月 20日 癸卯.
                  6) 『日省錄』正祖 15年 6月 5日 戊申.

    418           7)  『日省錄』正祖 16年 8月 21日 丁亥. “以先聖後裔錄用事 詢于大臣卿宰三司之臣 仍命赴燕書狀官 以閣臣差遣 求孔氏族譜” 이날의 기록
                    은 『孔聖誕辰筵話』(奎 5932)라는 별도의 책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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