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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리사’라 하고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내려주었으며, 춘추(春秋) 제향에 쓸 향축을 지방관에게 내
려보내서 제사케 하였다. 제향에 올릴 사품(祀品)은 니성궐리사의 예를 따르되 정약(精約)하게 하라
고 하였다. 정조는 새로 세운 영당이 읍의 유생이 사설(私設)한 것에 불과하지만 내각의 소장본을 함
께 봉안하였으니 사향(私享)과는 구별이 있다고 하였으며, 사원(祠院)을 지키는 재생(齋生)을 마을에
세거하는 공씨로 하고 다른 성씨의 유생들이 감히 섞여서 쟁단하지 못하게 하라는 전교(傳敎)를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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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에 걸게 하였다. 이렇듯 오산의 궐리사는 정조의 지시에 따라 면모를 일신하였고 제향에 관한
사항들을 정비하여 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10월 16일에는 초계문신을 직접 시험하는 과강(課講)과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
을 실시하여 유학(幼學) 공윤항(孔胤恒)을 급제에 들게 하고, 풍악을 내려 성균관 관원이 그를 인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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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반궁(泮宮)의 전당(殿堂)을 한 바퀴 돌도록 명했다. 이때 공윤항은 『시전(詩傳)』 주남(周南)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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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통(純通)을 받고, 『서전(書傳)』「堯典」에서 돌송(突誦)을 받았다. 양경(兩經)에 합격하면 특별 전교
로 급제를 내린다는 율(律)을 적용하여 공윤항을 급제시켰던 것이다. 공자의 후손이 수원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 시작된 공씨 후손의 녹용과 공서린의 시호 사급, 궐리사 영건 등 일련의 과
정을 볼 때 정조는 우리나라 수원에 공씨가 들어와서 정착하였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수원의 유학적
위상을 고양시키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정조는 건물을 지어 화상(畵像)을 봉안하는 날짜를 예조에서 복길(卜吉)하여 거행하게 하
였다. 궐리사는 10월에 개기(開基) 시역(始役, 역사를 시작함)하였으나 곧 엄동설한(嚴冬雪寒)을 만나
곧바로 정역(停役, 하던 일이나 역사를 쉼)하고 해를 넘겨 시행하게 된다. 1793년 2월 수원유수 채제
공은 1793년 2월에 개기(開基), 정초(定礎), 입주(立柱), 상량(上樑) 및 봉안(奉安)하는 일자를 예조에
명하여 다시 추택하여 하송해 달라고 장계를 올렸다. 정조는 성상(聖像) 봉안일자와 영건 각항(各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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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일자를 예조에 명하여 택길초기하고 비답을 기다려 유수에게 회유하라고 지시하였다. 예조에서
는 4월 3일 묘시에 먼저 북쪽부터 개기하고, 4월 8일 묘시에 북쪽부터 정초하며, 4월 11일 사시에 북
쪽기둥부터 입주·상량하는 것으로 시일을 정하였다. 필역한 후 성상(聖像)을 내각으로부터 이봉하
는 길일은 4월 28일 진시(辰時), 봉안길일은 5월 1일 신시이며, 영당의 소장본을 받들어 와서 봉안하
는 것은 동월 동일에 하는 것이 길하다고 하여 정조의 윤허를 받았다. 18)
채제공은 궐리사가 완공된 후 봉안하기까지의 시간이 많지 않은데, 내각의 성상을 받들어 올 때
반드시 예조의 지휘가 있어야 하므로 촉박한 데다가 수원 광덕면 영당에 있는 성상을 받들어 올 때
도 공씨들로 하여금 거행할 것인지 아니면 관부에서 위의(威儀)를 갖추어 거행할 것인지, 만일 위의
오산시사 를 갖추려면 마땅히 어떤 양식의 사례를 살펴야 할지 예조에서 마련하여 분부해 줄 것을 장계하였
다. 정조는 내각과 광덕면에 봉안한 성상을 봉안하는 의절 각 1건씩 써서 보낼 일을 해조에 분부하라
제
2 14) 『日省錄』正祖16年 10月 3日 戊辰.
권
15) 『正祖實錄』卷36, 16年 10月 辛巳.
16) 『日省錄』正祖 16年 10月 16日 辛巳.
17) 『日省錄』正祖 17年 2月 21日 甲申.
420 18) 『日省錄』正祖 17年 2月 21日 甲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