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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정조는 조정에서 향축을 내려보내기 때문에 유생이 제사를 주관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반대의견을
의식한 듯 이러한 제의(祭儀)는 외읍의 향반(鄕班)이 간혹 대신 거행하기도 하며, 더군다나 공묘(孔
廟)에 공씨가 전헌(奠獻)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느냐며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 정조가 이렇게
주장한 의도는 첫째로 공씨에게 제사를 주관시키고자 함이요, 둘째는 예를 갖추나 의절을 간략히 하
고자 함이요, 셋째는 처음부터 어지럽고 뒤섞이는 것을 제거하고자 함이라 하였다. 정조는 이 전교를
초기하여 해당 수신에게 분부하고 건사(建祠) 전교와 더불어 목판에 새겨 게시하게 하였다. 또 궐리
사를 지키는 유임 생도는 공씨 성으로 세거한 자가 아니면 일체 거론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오산 궐
리사는 조정과 관련되어 있으니 원장의 칭호는 마땅히 엄금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축문을 조정에서 내려보내기 때문에 제사의 주관자가 누가 되어야 하는지는 계속 쟁점으로
남아있었다. 다음날 축문을 쓰는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예조판서 김상집(金尙集)은 공씨 가운데
서 제관을 차출하라고 하명하였기에 궐리사 축문의 두사(頭辭) 가운데 ‘근견신하(謹遣臣下)’라는 표현
23)
을 ‘유학모(幼學某)’로 써야 되는데 사체(事體)가 맞지 않는다며 검토를 요청하였다. 이에 정조는 ‘유
학모’로 써도 상관없으나 대신에게 헌의(獻議)하라고 하였다. 이에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은 전례를
잘 모르니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게 하였고, 좌의정 김이소(金履素)가 정조의 뜻에 찬성하자 판부사
박종악(朴宗岳)도 동의하여 예조에서 아뢴 대로 ‘유학모’로 쓰게 하였다. 24)
이렇게 결정되는 듯했던 축식은 1793년 궐리사를 창건한 후 처음으로 가지게 된 9월 상정일 제향
을 앞두고 다시 논란이 거듭된다. 축문 가운데 “조선국왕”이란 문구가 들어가는데 ‘유학(幼學)’이 제의
의 주관자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조는 9월 1일 수원 궐리사 축식에 대해 문적을 상고하여
초기하라는 명을 받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축판(祝板)」 조에 문선왕 향사시의 축문은 ‘조선국왕
성휘(朝鮮國王 姓諱)’를 칭하고 또 다른 방법은 향축을 내려보내 제의를 진행하는 숭인전(崇仁殿), 삼
성사(三聖祠) 및 역대 시조묘(始祖廟)에는 모두 압(押)이 있으니, 지금 이 궐리사 축식도 이대로 거행
하기를 청하였다. 정조는 예조의 의견을 일단 윤허하였다. 25)
그런데 다음날 예방승지 서매수(徐邁修)가 다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서매수는 주상(主上)이
궐리사 제향 축문에 압(押)이 있는 것으로 윤허하였지만 당초에 궐리사를 설시(設施)한 것은 그 자손
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고, ‘궐리’로 이름한 사우를 지키고 분향하는 절차를 이미 공씨 자손이 주관
하게 하였으면 춘추 향사 또한 공씨가 주관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다는 정조의 인식에 일단 동의를
표하였다. 그러나 축식에 대압(代押)하는 것은 사체가 중대한 것이기 때문에 시골에 사는 유학이 왕
오산시사 명을 받들어 대신 행하는 것은 예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서매수는 니성궐리사처럼 향축과 제
품을 관에서 갖추어 향실(香室)로 보내지만, 대압하는 한 가지는 그냥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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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日省錄』正祖 17年 7月 25日 丙辰.
24) 『日省錄』正祖 17年 7月 25日 丙辰.
422 25) 『日省錄』正祖 17年 9月 1日 辛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