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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헌의를 명하였다.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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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공자 후손의 녹용은 이미 60년 전에 영조가 하교하였던  사항이었다. 정조는 수원에서 공씨                                        역사
                  후손들이 모여 산다는 것을 확인한 후, 공씨 후손의 등용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은 인사를 담당한                                           /  유적
                  전관(銓官)들이 지금까지 업무를 빙빙돌리며 지체시켰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당파에 따라 편사(偏私)

                  한 전조(銓曹)의 책임을 힐책하면서 이 문제를 반드시 개혁하겠다고 하였다.                       9)                              · 유물
                    공씨 후손 등용에 대한 정조의 단호한 태도에 신하들이 헌의한 결과는 기묘명현으로 이름난 공서

                  린의 후손을 찾아 녹용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우리나라에 공자의 직계파(直系派)가 없고 지파(支
                  派)만 있었던 이유였는데, 정조는 공서린의 후손이 곤궁하여 행장조차 찬출해 내지 못하고 아직껏 시

                                               10)
                  호(諡號)조차 내리지 못하였다면서  이는 녹용하라는 명이 있은 지 60년이 지나도록 수용하지 못하
                  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질책하였다.

                    정조는 그로부터 5일 뒤에 경기도 관찰사를 시켜 수원 구정촌(九井村)에 있는 성묘유지(聖廟遺址)
                                                                                          11)
                  의 도상을 그려오게 하는 한편, 용인에 있는 공서린의 직계 후손을 찾아보게 하였다.  다음 날 예조
                  에서는 공서린의 직계후손 공윤도(孔胤道)가 선산(善山)에 살고 있는데 시장(諡狀, 재상이나 학자들
                  에게 시호를 청할 때 해당자의 행적을 적은 글)의 일로 곧 상경할 것이며, 고(故) 참봉 공덕일(孔德一)

                  의 6대손 공윤동을 통해 직계자손을 확인하였다는 계문을 올렸다. 이에 대해 정조는 우리나라에 온
                  공씨는 마땅히 고(故) 대사헌 공서린을 정통(正統)으로 삼아야 하며, 또한 참봉으로 특제된 뒤 불사

                  (不仕)한 공덕일 계파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 두 파 후손을 즉시 수용하고, 이후에는 양 파 후손 가운
                  데서 선발하여 세세(世世)로 녹사(祿仕)시키게 하였다. 또 중국 연성공(衍聖公)의 세작(世爵)을 모방

                  하여 만일 문관·음관·무관 가운데 공 씨가 한 명도 없을 경우 양파(兩派) 가운데서 통융(通融)하여
                  초사(初仕)에 수용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어람 관안(官案)의 권수와 정안(政案) 첫 장에 써넣어, 전

                  교를 영세토록 준행하게 하였다.          12)
                                                                              13)
                    그리고 1792년 9월 29일에 공서린에게 문헌(文獻)의 시호를 내린 후  4일 후에는 궐리사를 영건
                  (營建)하라는 하교를 내리게 되는데 이미 도상형지를 살펴본 후 계획을 세워두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조는 “공씨가 우리나라에 와서 처음 수원에 거처한 것이 읍승(邑乘, 읍지)에 실려 있고, 일전에 도

                  신(道臣)에게 도상과 형편을 들이라 하여 보니 과연 기이하게도 궐리에 사우(祠宇)와 은행나무가 있
                  으며, 세거한 후예가 있었다. 또 궐리에서 수십리 떨어진 곳에 새로 건립한 영당이 있다.”는 것을 열

                  거하면서 예외적으로 수원에 궐리사 창건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경기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궐리사 영건을 감독하게 하고 성상(聖像)을 편히 모시게 하였으

                  며, 내각(內閣)에 있는 공자 영정과 영당에서 본래 봉안해 오던 영정을 함께 간직하게 하였다. 이름은




                  8) 『英祖實錄』卷45, 13年 9月 己酉.
                  9) 『日省錄』正祖 16年 8月 21日 丁亥.
                  10) 『日省錄』正祖 16年 8月 21日 丁亥.
                  11) 『日省錄』正祖 16年 9月 2日 戊戌.
                  12) 『日省錄』正祖 16年 9月 3日 己亥.
                  13) 『正祖實錄』卷35, 16年 9月 乙丑. 같은 날 『日省錄』에는 諡法을 “勤學好問曰文 嚮忠內德曰獻”이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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