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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정조는 서매수의 말이 집예(執藝)의 뜻을 갖추었다면서 예조에 초기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예조                                        423
                  가 다시 올린 품의는 축식 때문에 유생이 제사를 주관할 수 없다는 것은 그전에 이미 아뢰었으나 정                                          역사

                  조의 강한 주장에 밀려 채택되지 않았었다는 것이었다.                                                                    /  유적
                    예조의 품의에 대해 정조는 자신의 처음 생각을 고쳐 지방관인 수원부 판관(判官)이 초헌(初獻)을

                  하고 공씨 후손이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을 하도록 수정하였다. 이리하여 궐리사의 제향은 지방관이                                         · 유물
                  초헌관이 됨으로써 위의(威儀)를 갖추게 되었으며 제의의 위격은 지방 관아 차원의 행사가 되었다.

                    정조가 궐리사 제향을 공씨 주관의 행사로 만들고자 하였던 것은 신읍(新邑)의 경영과 관련된 것으
                  로 판단된다. 정조는 수원지역이 전통적으로 상무지향(尙武之鄕)으로 일컬어져서 문풍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조는 수원에서 공씨의 세거지가 확인되자 궐리사를 건립하게 하여 수
                  원에 공자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 하였던 것이고, 이를 통해 수원의 유학적 위상을 끌

                  어 올리고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 후 정조는 1794년 알성시에 급제한 공윤항의 방목단자(榜目單子)에 본관을 곡부(曲阜)로 써넣게

                  하였는데, 예조에서는 모든 공씨가 공자의 후손이므로 모두 함께 시행하여 이동(異同)이 없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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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어 정조가 윤허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공씨의 본관은 곡부로 확정되게
                  되었다.
                    궐리사 건립을 통해 수원의 유학적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던 정조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1808년 수원유생 이항겸 등 273명은 윤광안(尹光顔)에게 가율(加律, 이미 정해진 형
                                                                28)
                  벌에 정도를 더함)을 청하는 연명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때 수원유생들은 윤광안을 비판하는 상소
                  를 올리면서 “대성(大聖)의 사당이 노성에 있고, 우리 고향에도 궐리사를 세웠다.”는 점을 내세웠다.
                  다른 고장에는 없는 궐리사가 수원에 있다는 점을 부각하여 수원이 공자의 유풍이 있는 고장이라는

                  점을 은근히 과시하였던 것이다.


                  3) 19세기의 궐리사

                    1800년 정조의 서거 이후 수원 궐리사는 정조가 창건을 명한 사액사우(賜額祠宇, 임금이 편액을 내

                  린 사당)라는 점 때문에 정조 이후의 국왕들이 현륭원(顯隆園)과 건릉(健陵)을 참배하였을 때에는 정
                  경(正卿, 정이품 이상의 벼슬을 이르는 말)을 보내 전작(奠酌)하게 하는 등 ‘정조 유적지’로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순조가 1804년 현륭원과 건릉을 참배한 후 돌아가는 길에 궐리사를 비롯한 여러 곳에
                  사람을 보내 전작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29)

                    그런데 1804년 9월 상정일 제향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면, 수원유수 김문순(金文淳)이 병을 이유로



                  26) 『日省錄』正祖 17年 9月 2日 壬辰.
                  27) 『日省錄』正祖18年 3月 3日 庚寅.
                  28)  『日省錄』純祖8年 5月 29日 甲子. “水原儒生李恒謙 等二百七十三人 疏請尹光顔 等 加律賜批.” 윤광안은 경상도관찰사 재임 때에 주
                    자(朱子)와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한 영양 운곡서원(雲谷書院)에서 세운 공자의 영당을 철거하고 영정을 니성 궐리사로 옮긴 일이 있었
                    다. 이것이 정조 사후에 문제가 되어 1808년(순조 8) 암행어사 이우재(李愚在)의 탄핵을 받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죄명으로 함경
                    도 무산부에 유배되었다.
                  29) 『日省錄』純祖 4年 9月 1日 丁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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