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전시가이드 2023년 09월 이북
P. 39

Henri Cueco, 사냥개들, 캔버스 아크릴화, 1993, Stämpfli 재단 소장 ⓒADAGP   한선미, 오 나의 사슴, 100 x 80 cm, 캔버스 아크릴화, 2023 ⓒADAGP











            회원전」에 출품된 한선미 작가의『오 나의 사슴(2023)』을 대한 순간, 현대미술   신 <젊은 창작>으로 이름을 변경했고, 파리 시의 후원으로 전시회가 벌어진
            거장인 앙리 쿠에코(Henri Cueco)의 대표작『사냥개들(1993)』의 거친 이미지  이후 계속 전시회에 따라 붙어 다니던 '살롱'이란 말도 떼버렸다. <젊은 창작>
            가 전율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한선미 작가의 현재는 수십 년 전에 젊은     은 조형미술에서 계속 일어나는 변화들을 지켜보면서 다른 매체의 도입에 대
            혈기만으로 당대의 야수와도 같은 세상과 맞서던 앙리 쿠에코의 고독한 삶이        해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다. 또한 일본, 퀴벡, 이탈리아, 독일, 미국, 오스트리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앙리 쿠에코는 1949년에 열린 당대 기      아, 콜롬비아, 한국, 덴마크, 폴란드 등 점점 더 많은 외국 작가와 집단들의 유
            성세대에 저항하던 청년 작가들의 열린 창구 역할을 했던 <젊은 창작>의 전       입을 경험하고 있다. 오늘날 <젊은 창작>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
            신인 ‘젊은 회화’전에 참가한다. 당시 문화계는 공산당이 점유하고 있었고, 상     요한 예술가 집단 중 하나로 영구히 살아 숨쉬고 있다.
            업 화랑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중에 추상미술을 주로 전시하던 파리 살롱의 엘
            리트들 사이로 구상적 경향이 강한 젊은 예술가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한선미 작가는 【AIAM국제앙드레말로협회】회원 작가들 가운데
            폴 르브이롤르(Paul Rebeyrolle, 1926~2005)가 청년 미술가들을 위한 ‘젊은   서도 드물게 이국 땅에 상주하면서, 현지 생활의 고달픈 현실 속에서 수반되
            회화’전을 1949년 처음 열었고, 1953년에는 같은 이름의 협회가 만들어졌다.   는 ‘문화 충격’을 고스란히 감당해 내고 있다. 필자 역시 긴 세월 동안 외국에
            협회가 창설되자 조금씩 사람들이 젊은이들의 그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         서 체류하다 보니 현지인들과의 경쟁과 투쟁을 통해 자연스레 습득한 ‘생존
            고, 이듬해인 1954년에는 파리시가 《시립현대미술관》에서 젊은 작가들을 위      본능’이겠지만, 때로는 그야말로 살아남아야 하는 멘탈 수습과정에서 ‘내가 먼
            해 정기적으로 살롱전을 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열린 '젊은 회화전'(Salon    저 무느냐, 물리느냐’의 결정은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 사안’이 되기도 한다.
            de Jeune Peinture)은 1960년대 내내 그 시대의 정치적 논쟁점들을 반영하  특히, 오직 한 자리만을 놓고 내, 외국인 여부와 상관없이 서로 경쟁해 차지해
            면서 사회 갈등의 계기판이 되었다. 1969년 『정치와 문화』전을 열면서 보인     야 하는 상황에서는, 평소 잠들어 있던 ‘야성의 호출 신호’에 따라 내 삶의 희
            주제나 "베트남을 위한 빨간 방" 등이 증명하듯, 열성적이고 전투적인 회화의      비가 엇갈린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겪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복귀를 볼 수 있었고, 신조형주의 같은 새로운 사조를 열었으며, 그러한 미술      한선미 작가의 개인적 입장을 고스란히 십분 공감하기는 힘들 것이다. 무엇보
            운동에 앞장 선 여러 화가들이 연합하는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했다. 앙리 쿠에       다도 그녀는 소위 말하는 현지 외국인과 ‘국제 결혼’을 한 후 현지에 정착한 여
            코는 질 아이요(Gilles Aillaud), 에두아르도 아로요(Eduardo Arroyo), 피에르   성 작가이기에, ‘인생의 고난지수’를 단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부라글리오(Pierre Buraglio), 자크 모노리(Jacques Monory), 베르나르 랑시  있다. 물론 천편일률적인 시나리오에 따라 어림짐작만으로 타인의 행 · 불행
            약(Bernard Rancillac) 등과 활동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1969년의   을 재단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녀와 남편 사이에는 상상 이상의 ‘화합 에너지’
            전시를 끝으로 협회는 분위기가 바뀌어버렸다. 정치적 대립 축이 팽팽히 맞서       가 생성되어 가장 이상적인 가정 생활을 영위해 갈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근
            는 중에 더 이상 협회에서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유력 인물들이 모두 협      본적인 ‘문화 차이’로 인한 갈등 요소가 불거져 나올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
            회를 떠나버렸다. 이후 10년 동안 '젊은 회화'는 전시회의 목적이 무엇인지 회    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생이 예술가라면 인생 역정의 함수 곡선이 들쭉날쭉
            의하며 내부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다. 1980년 콩차     한들 무슨 상관이랴. 마치 앙리 쿠에코의『사냥개들(1993)』처럼, 한선미 작가
            베네딕토(Concha Benedito, 1936~)가 협회장이 되자 협회는 재구성되기 시  의 화가 생애 전반에 걸쳐 시도 때도 없이 삶의 고단한 무게가 날카로운 이빨
            작했고, 1981년에는 프랑스의 조형예술 3부회의 자격을 갖고 그 단체에 참여     을 드러내며 달려들지라도, 아무쪼록 성찰하는 【ADAGP 글로벌 저작권자】의
            했다. 1980년대에는 카트린 누이노(Katerine Louineau)를 의장으로 해서 엄  일원으로써 그녀의 외로운 작가로써의 도전 의식이 ‘새로운 정신’에 의해 함
            격하게 전시 출품작을 선정하도록 선정위원회를 운영한 덕에 협회가 다시 제        양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위치를 되찾았고 이전의 수준과 질도 회복했다. 2000년부터는 '젊은 회화' 대


                                                                                                       37
                                                                                                       37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