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5 - 칭의와 성화-김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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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교회 개척 당시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르쳤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를 설명하면서
예수가 ‘사시고 참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도록 설득하고, 그가 그런데 왜 죽음을 맞았으
며 어떻게 부활되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인가 등을
설명하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이 이런 설명들을 하지 않았는데도 데살로니가인들이 자신
들의 신들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신을 참 신으로 인식하고, 예수를 그의 아들로 믿으며, 그
의 재림과 구원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5:1~5에서는 3~5절의 네 마디를 ‘복음’이라고 하며, 바울은 그것을 자기보
다 먼저 사도 된 자들에게서 받아서 고린도인들에게 넘겨준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데
살로니가전서 1:9~10에 요약된 복음이 고린도전서 15:3~5에 요약된 복음보다 내용적으로
복음의 요소들을 더 많이 담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학자가 고린도전서 15:1~2의 서언(序
言)에 따라 뒤이어 나오는 3~5절의 네 마디를 복음의 요약이라고 인정하는데, 그렇다면
그보다 내용적으로 더 풍부한 데살로니가전서 1:9~10을 복음의 요약으로 보지 못할 이유
가 어디에 있습니까? 만일 누가 데살로니가전서 1:9~10의 두 구절들을 바울의 복음에 대
한 한 편의 온전한 강해라고 주장한다면 후커(Hooker)식의 반론은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
나 그것은 그 구절들은 복음의 요약이니 그 속에 함축된 뜻들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에는
전혀 타당하지 않은 반론입니다.
사실 이 모든 논란이 심지어 학자들까지도 때때로 원자(原子)주의, 문자주의식 해석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헛된 논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믿는 사
람들을 뭐라고 합니까? 실증주의자라고 하지요? 분명히 문자로 쓰여 있지 않으면 없는 것
으로 보는 이 ‘문자 실증주의’, 그리고 바울 서신의 구절들을 그들의 직접적인 문맥뿐 아니
라 바울신학의 전체 맥락에서 보거나 그 속에 함축된 뜻과 행간의 뉘앙스까지 헤아리는
것을 거부하고, 어떤 단어나 구절만 뚝 떼어 다루는 ‘원자주의적 해석’(atomistic exegesis)
은 특히 데살로니가전서 1:9~10 같은 구절들을 해석하는 데는 아주 비현실적인 해석 방법
입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로마서 1:3~4에 요약된 복음의 해석에도 적합하지 않은 방
법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9~10에 요약된 복음은 두 마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우상들을
버리고, 사시고 참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고, 둘째는 그의 아들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롬 4:25; 고전 15:3~5; 살전 4:14; 등). 그러니까 이것을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
도의 사건’ 또는 ‘구원의 사건’이라고 합니다. 즉, 메시아/그리스도, 곧 종말의 구원자가 이
루신 구원의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그리스도의 사건이 이렇게 간략하게 진술이 되었
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강조점이 놓여 있습니까? ‘일으키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
되신 분입니다. 로마서 1:4이 생각나지요? 그분이 장차 하늘로부터 와서 우리를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건져 낸다는 것입니다. ‘진노로부터 건져 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칭의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합
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인이라 최종 선언을 받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32~34이 생각나지요? 그러
니 데살로니가에서도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칭의론으로 선포한 것이 이렇게 드
러납니다.